Old & New 송파장과 서울놀이마당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어우러짐의 한마당
“얼쑤 절쑤 얼쑤 절쑤~~”
작년 8월 14일 우중임에도 불구하고 서울 한복판 잠실벌 서울놀이마당에서는 길놀이, 씨름, 줄타기, 민요, 풍물놀이와 더불어 “송파산대놀이”의 신명나는 한판이 벌어졌다.
바로 송파민족보존회가 주관하고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보호재단, 그리고 송파구가 후원하는 송파백중놀이 제20회 정기공연이다.
정월 초하루, 사월 초파일, 오월 단오, 칠월 백중 뿐만 아니라 매주 토, 일요일 오후 3시면 송파구 석촌호수변 서울놀이마당에서는 우리의 다양한 민속공연들이 무료로 펼쳐진다.
전통적인 민속예술의 발견, 전수, 전승, 보존을 목적으로 1984년 12월 15일 서울시에 의해 건립된 서울놀이마당은 관람석 1500석으로 전통적인 팔작지붕과 배흘림기둥의 멋스런 외관을 가졌다. 행정상의 주소는 잠실동 47번지이지만 석촌호수 서호 변에 위치해 있어서인지 흔히들 석촌동 서울놀이마당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바로 이곳이 조선시대 전국 최대장이라고 일컫는 송파장의 놀이판 즉 놀이패들의 무대였던 자리다.
석촌호수는 본래 송파나루가 있었던 한강의 본류로, 한성과 충청, 경상, 전라를 잇는 중요한 뱃길의 요지였다. 서울근교 5대 한강나루터(송파, 한강, 서빙고, 용산, 마포)중에서도 수운(水運)으로는 강원도까지 배가 오갔으며, 육운(陸運)으로는 보부상과 마행상들이 전국을 돌던 대표적인 상업지역이였으므로 항상 번성하였던 곳이다. 송파나루는 특히 물이 풍부하고 유속이 빠르지 않아 배를 대기 좋은 입지를 가지고 있어서 삼남에서 올라오는 물화는 물론이고 북쪽에서 한양을 거치지 않고 내려오는 특산물까지 집결되었기 때문에 조선후기 상업의 비약적인 발전 한복판에는 늘 송파장이 있었다.
1809년 (순조 9년)에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에 의하면 전국 1천 61개의 향시(鄕市)중첫 손으로 꼽힌 곳이 송파나루에서 열리는 송파장이라고 하였으니, 한양도성과 전국 각지를 연결하는 거대 장으로서의 면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송파장은 취락 가운데 있는 노천에 가점포가 자리를 잡은 형태로 주변에는 대장간 등 각종 수공업점포와 200여개의 여각, 객주, 술집들이 들어서 있었고, 서쪽으로 우시장이, 마을 한가운데에는 곡물장과 가축장이 주로 섰다. 한창 흥하였을 때는 송파나루에 수십 척에서 많으면 백여 척에 이르는 경강선이 정박하였다고 하니 아마도 장터는 하루종일 무척이나 복잡했을 것이다.
그래도 혹여 장이 흥청거리지 않는다 싶을 때엔 송파장 상인들이 돈을 모아 흥행위주의 연희 성격을 강하게 띠는 놀이패를 불러 공연을 하였는데, 그것을 위해 송파장 가운데에는 자연스레 놀이판 즉 무대가 마련되었다.
보통의 탈놀이가 주로 저녁 무렵에 행하여지던 것에 비해 낮 시간대로 점점 공연시간이 앞당겨진 것도 송파장의 특성상 많은 사람들을 모이게 하기 위함이었고, 특히 칠월백중에는 이 놀이극을 보기위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하니 송파장 상인들 입장에선 분명 그 몫을 톡톡히 받아낸 듯 싶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공연이 바로 “송파산대놀이”이다.
산대(山臺)란 연극을 하기 위해 높이 대를 모아 임시로 만든 무대를 의미하는데, 산대극은 고려 이전부터 행하여져 왔으나 고려시대 궁중극으로서의 ‘산대잡희(산대잡극)’에서 그 유래를 찾는 것이 일반적이다.
조선시대 광해군 때는 산대도감을 둘 정도로 번성하기도 했지만 임진, 병자 두 란을 겪으면서 궁중의 재정적인 곤란과 여론의 힘에 밀려 1634년 (인조 12년)에 공적인 의식으로서는 폐지되기에 이르렀고. 그 후 한양도성을 벗어나 전국적으로 흩어지게 된 ‘도감패’들의 일부가 놀이패를 결성하여 애오개(아현동), 녹번, 구파발, 사직골 등에서 ‘본산대(本山臺)’로의 정통성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일제 강점기 이후 근대도시화의 물결 속에서 그 명맥을 제대로 잇지는 못했다.
그런데 한양의 ‘본산대’도 아닌 ‘별산대(別山臺)’로서 꿋꿋이 불씨를 살려낸 놀이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서울에서 유일한 중요무형문화재 49호로 지정된 “송파산대놀이”인 것이다.
별산대란 본산대가 공연 홍보를 위해 순회공연을 하고 나면 각 지방에서 이를 흉내 내어 산대놀이를 펼치게 되는데 이것을 통칭하는 것으로 “양주별산대놀이”와 “송파산대놀이”가 대표적이다.
당대인들에게 송파산대놀이는 최대의 구경거리였다.
익살스런 표정의 27종 32개의 탈(먹중의 출연 수에 따라 최대 35개)과 흥겨운 춤사위, 맛깔스런 재담 한 대목 한 대목에서 구경꾼들 모두는 한마음이 되어 마음 속 응어리들을 다 토해냈을 것이며, 나 하나밖에 모르던 사람들에게는 ‘우리’를 알게 해주는 기분 좋은 경험의 장이 되었을 것이다.
과장된 몸짓과 정제되지 않은 말투, 익살스런 동작과 표정, 거기에 걸 맞는 춤사위,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장단, 오픈되어 있는 무대, 오방색의 컬러플한 의상 등을 통해 신분을 막론하고 누구든, 무엇이든 시원하게 풀 수 있었던 장, 그것이 바로 송파산대놀이 한마당이 아니었을까?
3絃 6角의 반주에 맞춰 이뤄지는 상좌춤 놀이, 옴중·먹중 놀이, 연닢·눈끔쩍이 놀이, 애사당 북 놀이, 팔먹중 곤장 놀이, 신주부 침 놀이, 노장 놀이, 신장수 놀이, 취발이 놀이, 말뚝이 놀이, 샌님·미얄·포도부장 놀이, 신할애비·신할미 놀이의 열두마당은 성직자의 부패, 서자의 설움, 계층·처첩 간 갈등 등 시대상 풍자가 주가 된 재담과 창을 곁들여 가며, 마지막 열두번 째 마당에서는 죽은 자를 위로하는 지노귀굿도 벌려 판을 흥미롭게 이끈다.
타령-깨끼리춤(깨끼춤), 굿거리-건드렁춤, 염불-거드름춤의 유형으로 나뉘는 춤사위는 다시 40여종으로 세분화되어 있어서 한국 민속무용의 춤사위로 대변되기도 한다.
재담에 있어서도 옴중 곰보타령, 취발이의 각설이타령, 무당의 巫歌와 넋두리 등이 발굴, 전승되어 연희되고 있는데, 다소 투박하면서 과장된 형태의 탈들과 더불어 우직하게 살아온 서민들의 애환을 충분히 공감하게 해주는 요소들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번창했던 송파장도 1900년대에 들어와 경인철도와 광진교의 준공으로 배 없이도 서울 통행이 원활해지면서 점점 상업세력이 분산되어 침체기를 맞게 되었다.
더구나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송파장 자체가 유실되어 사라져 버린 후에는 그곳에 기반을 두었던 송파산대놀이도 자연 시들해 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맥이 끊기는 듯 하였으나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자 했던 숨은 이들의 노력 덕분에 옛 놀이꾼들의 구술과 채록으로 복원되기 시작하여 이를 바탕으로 1963년과 1972년에 전국 민속경연대회에서 본상을 수상하면서 1973년 5월 중요무형문화재 49호로 지정되었다. 그 후 제대로 된 공간 없이 신송파 장터에서 전수되다가 마침내 1984년 서울놀이마당의 건립과 더불어 제대로 된 공간에서의 공연이 가능케 되었던 것이다.
올 여름에도 백중날이면 송파산대놀이를 비롯한 우리의 흥겨운 가락들이 서울놀이마당 한가운데 가득 울려 퍼질 것이다. 1989년 9월, 70여년 만에 송파백중놀이를 재현한 이래 스물 한 번째 맞게 될 이번 정기공연이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것은 바로 그 안에서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우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 아닐까!
글=김경숙(송파문화원 문화해설사)
2010년 송파문화원 박물관대학 수료후 심화과정을 거쳐 송파문화해설사로 활동 중이다. 지난해엔 한성백제박물관의 “미리보는 박물관”에서 전시해설을 하며 자원봉사 일을 하였다. 4월30일 정식으로 문을 여는 한성백제박물관에서도 전시해설사로 활동할 예정이다.
2012. 04. 19 (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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