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흔적따라

진실을 은폐시키는 중국정부와 고고학적 진실

wowjenny 2011. 2. 8. 23:33

 

 

진실을 은폐시키는 중국정부와 고고학적 진실 [0]

윤복현 (younbok****)

주소복사 조회 2142 08.09.17 10:58

 

 

 

중국 서안지역 피라미드 발굴에 참여한 중국인 故 장문구(張汶邱 )씨가 임종전 증언내용이다. 
 
"1963년4월에 우리 고적발굴팀 36명은 당국으로부터, 진시황의 다른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을 조사해야하니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출발전, 조사단장은 우리발굴단원들에게 이번 유적은 매우 중요하여 조사,발굴 내용을 외부에게 일체 누설하면 안되니 이점을 각별히 유념하기 바란다고 말하였고, 우리일행은 기차와 버스,트럭을 나누어타고 이틀만에 목적지인 넓은 평원지대에 도착하였는데 창밖으로 이집트 피라밋처럼 거대한 피라미드들이 많이있었고, 도착한 우리발굴단원들은 하나같이 모두 탄성을 질렀어요. 우리 중국에도 이런 피라밋이 있었구나! 하는 기쁨과 경이로움이 뒤섞여서 말이죠, 우리는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의 또다른 이 엄청난 유적을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조사단은 4팀으로 나뉘어져 이후 3일동안 피라미드의 가장 큰 순서대로 먼저 가운데 3개 피라미드를 지정하여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3곳다 거의 한 형태의 것이었는데 이중 양옆의 두곳보다는 가운데것이 대단했어요.거대 한 벽돌 피라밋 지하입구로 들어가자 약 3~5층으로 석실이 나뉘어져 있었고, 상층부 공간으로 들어갈수록 말과 마차를 그림으로 화려하게 조성된 벽화, 그림, 여러 문자(중국글 한국글등)들, 조각류 약 6200여점, 맷돌, 절구, 솥, 그릇등 생활도구 1500여점, 배추김치(원래김치인 백김치) 동물의 뼈등 음식물 400여점, 청동검, 활, 금관(신라형),칼,창등 장신구류등 부장품 7800여점, 상투머리를 한 정 중앙시신(진시황의 모습과 흡사했다고 증언. * 참조:중국 고대문헌인 '후한서-동이열전'에 보면 한반도 남부지역의 '마한'사람들에 대해 기록하기를, "대부분 모두 맨머리에 드러난 상투를 틀고 베로 만든 도포에 짚신을 신는다...흙으로 집을 짓는데 모습이 마치 무덤과 같으며 출입문은 위쪽으로 열어둔다...사람들은 건장하고 용감하여 어린 나이에도 집을 짓는 등 힘을 쓰는 자가 있는데, 대수롭지 않게 새끼줄을 등골 가죽에 관통시키고 큰 나무를 매어 달아 힘 있게 외치며 일하는 것을 건장하다 여긴다.  "는 내용으로 보아 서안지역 피라미드의 주인공과 짚신을 신고다녔고 태양을 중요시했으며 거대한 피라미드를 건설한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모두 만주에서 동.서쪽으로 이동한 한반도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흙을 다져 현대 콘크리트 공법으로 쌓은 한성백제 유적에 해당되는 풍납.몽촌토성또한 당시 마한 사람들이 대거 동원된 마한의 축조기술이라 할 수 있다)등 14구과 호위상 3000여점 등이 대량발견 되었습니다. 


우리는 난생처음보는 이러한 너무나도 엄청난 유물, 유적에 대해 모두 하나같이 무엇에 홀린듯하였으며, 마치 외계인의 세계,외계인의 무덤을 발굴하고있는듯한 느낌들이었습니다.저는 그 유물들을 확인하면서 목록을 작성하는 일을 했었는데, 작업 3일째되던날 대충 7할정도 파악, 작성된 상황이었고 이날 오후쯤에 이를 당시 발굴 단장이던 모 교수에게 중간 보고하자 그분은 큰 한숨을 내쉬면서 이런말을 했어요, “이 유적은 우리 화하족유물이 아니라 조선인들의 유적이다...중화역사 이전의 조선문명이야! 라고 말하면서 큰일이다!..

 

일단 당국에 보고 한 후에 다시 지시를 받아야 하니 지금까지 발굴을 모두 중단하고 유물들은 모두 그자리에 두고 일단,오 늘은 그만 나가세!" 라고 말하여 모두 발굴을 중단한채 나와 숙소에 있게 되었는데, 그날 밤 발굴중단과 동시에 철수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우리 발굴단원들은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그 유적이 우리의 유적이 아니기때문이라고 이해하였고 일행은 그곳에서 떠나기에 앞서 숙소에서 현지공안에게 이곳에서의 비밀을 지키겠다는 서약서를 작성 제출였고, 그렇게 돌아온 이후, 그 피리미드들에 관해 더이상 들은적은 없습니다. 그게 그 피라미드에 대한 저로써의 마지막이었고 제가 아는 다 입니다" 
 
故 장문구(張汶邱 )씨의 임종 전 증언내용처럼 
내몽골, 만주, 북중국 지역에 가면 정체불명의 피라미드들이 수 없이 서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것은 100개 이상이다. 평균 25 ~ 100 m 높이의 피라미드들이다. 그 중에는,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츠 빌딩과 맞먹는 300 m의 높이를 가진 것도 있다. ( 63 빌딩의 거의 2배 가까운 높이 ) 이집트의 기자 피라미드보다 거의 2.3배 정도 높고, 면적 또한 여의도보다 큰 거대한 건축물이다. 이런 것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고대의 기술로는 연인원 100만명이 소요된다고 한다.

최초의 발견은, 1945년에 인근을 비행하던 미국 수송기 조종사의 사진촬영과 보고서에 의해서이다. 그 이전까지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산으로 알고 있었다.

1963년에,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이들 거대한 피라미드를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무덤으로 예상하고 발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73년에 실시된 고고학계의 탄소 연대 측정법에 의해, 그 거대한 피라미드는 진시황의 무덤보다 수 천년 앞서 만든것 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현재, 이들 유적들은 중국 공안 당국에 의해 철저하게 숨겨지고 있다. 중국정부는 무엇이 두려워서 서안지역에 산재되어 있는 거대한 피라미드 무덤군들에 발굴과 촬영과 출입을 금지시키고 나무들을 심어서 진실을 은폐하려는 것일까? 그것은 고대 세계사의 주역이였던 동방족(동이족=한반도 사람들)의 실체를 감추려는데 있는 것이다. 그럼 무덤양식을 통해서 동방족의 역사적 실체를 자료들을 토대로 알아 보기로 하자.

 

 

한반도 고인돌 무덤의 위상과 고대사의 주역


세계 고인돌 분포의 비중의 70%은 한반도지역에 분포되어 있으며, 피라미드 무덤양식의 기원이 되는 남방식 고인돌(땅을 파서 시체를 묻는 다음 돌이나 흙을 덮는 방식으로 피라미드양식.홍산문명의 무덤양식과 고구려의 적석총양식의 원형)은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한반도 남부지역에 집중 분포되어 있으며, 연대는 8천여 전의 무덤양식으로 한반도 사람들의 고유한 무덤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고인돌 무덤양식은 단군조선시대의 무덤양식이라기 보다는 단군조선이전부터 전해 내려온 만주와 한반도와 산동반도에 분포된 동방족의 고유한 무덤양식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분포지역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만주와 산동반도,그리고 열본의 큐슈지역에 분포된 것으로 보아 고인돌문명의 중심지는 역시 서해가 바다가 되기전에 [마]문명의 중심지였다고 볼 수 있는 한반도 서남해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한반도 서남해 지역을 중심으로 콤파스를 그리면 둥근 원지역으로 만주와 한반도,그리고 산동반도와 일본열도가 들어온다. 그래서 피라미드.고구려 적석총.홍산무덤양식의 원형이 되는 남방식 고인돌무덤양식의 주인들 또한 한반도 서남해지역의 [마]문명인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서남해 섬들에도 고인돌 무덤들이 많이 산재한 이유가 될 것이다. 서해가 바다가 되면서 육지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호남지역에 남방식 고인돌무덤들이 집중 산재해 있는 것으로 보아 서남해 지역에서 가까운 호남지역으로 집중 이동한 것으로 보이며, 점점 북으로 이동하여 만주와 연해주를 중심으로 다시 유라시아와 아메리카로 이동한 동방족(한반도사람들)이 피라미드와 적석총 무덤양식으로 대변되는 환국문명.홍산문명.슈메르.이집트.마야.아즈텍 문명의 주인들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은 과학적 증명을 토대로 하는 고고학.유전학을 통하여 증명되고 있다.
 
예컨대, 이집 트 피라미드의 주역들도 고대 한반도 사람들이 부적으로 사용한 3마리 물고기 문양을 제사그릇에 표기하여 사용한 한국인들임이 밝혀졌다. 그리스.이집트.히브리.인더스문명 등 서양문명의 기원민족이 되는 슈메르인들도 언어와 풍습과 문자.천문내용이 고대 한국인들과 동일한 동방족임이 밝혀졌으며, 지금의 서양언어(인도-유럽어족) 또한 그 조상어가 아리안족이 사용했던 고대 인도의 고급언어로써 불교범어로 사용된 산스크리트어인데, 이 고급언어라는 산스크리트어가 고대 한국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으니, 과히 고대에는 한반도와 만주에서 터를 잡고 살았던 우리 동방족의 독무대였음이 명확히 입증된 셈이다. 그래서 "빛(문명)은 동방(한반도)에서!"라는 로마의 격언이 나온 것이며, "동방의 등불 코리아"라는 인도시성 타고르의 시어가 나온 것이다.
 

* 아리안족의 산스크리스트어(서양어의 조상어)

 

아리안족은 '아리랑'족으로도 불릴 수 있는데, 그 배경은 중앙 아시아에서 기원하여 일부는 인도을 정복하여 힌두교와 카스트제도(1순위:한국인=브라만)를 기반으로 인도문명을 꽃 피웠으며, 일부는 중동과 유럽을 정복하여 중동과 유럽문명의 주역이 되었다. 아리안족의 언어가 한국어라는 사실은 이들이 한반도와 만주에서 서진한 고대 한국인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고, 히틀러가 그렇게 자랑했던 게르만족의 겨우 이들 아리안족과 백인족의 혼혈족 정도로 보면 될 것이다. 또한 이 게르만족이 유럽을 정복한 로마제국의 주역들이다.



한국사람이 인도 수라스트란반도 구자라타주 바도다라시에 가면 놀라움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이유인즉 거리의 상가 간판을 절반 이상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 成俔(성현)은 <용재총화 제7권>에서, “세종께서 언문청을 설치하여 신숙주, 성삼문 등에게 명하여 언문을 짓게 하니, 초.종성이 8자, 초성이 8자, 중성이 12자였다. 그 글 자체는 범자(梵字)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며,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의 어음문자(語音文字)로써 표기하지 못하는 것도 모두 막힘없이 기록할 수 있었다. ”고 말하고 있다.

뜻은 같지 않지만 모양이 너무나 닮은 인도 바도다라시의 문자는 범자(梵字) 한글 기원설과 고대의 가림토와의 관계 등은 민족의 이동설을 다시 한번 재고해 보게 한다.
또한 그 고장에서 유명한 MS대학에는 이천년 동안 언어의 변천을 기록해 놓았는데 정말 놀랍게도 한글과 자모(子母)가 같은 문자가 ‘ㄴ, ㄷ, ㅌ, ㅇ, ㅁ, ㅂ, ㄹ, ㅓ, ㅗ, ㅣ’이었고 산스크리트어 알파벳은 우리가 초등학교 때 배운 한글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꺼커거, 쪄쳐져, 떠터더, 뻐퍼버, 셔허” 게다가 산스크리트어의 알파벳은 우리 한글처럼 ‘ㄱ’으로부터 시작해, ‘ㅎ’으로 끝난다고 했다.

이와 같이 인도 구자라트에 한글의 모양이 닮은 것은 자음 가운데,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등이고, 모음은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ㅡ, ㅣ’의 열자가 똑같다.
사정이 이러하니 두 문자 간에 전혀 관계가 없다고 누가 장담 할 수 있을까? 고대의 문자에서 풀어져 나오는 비밀은 뭔가 한글 창제의 기원과 조상의 이동설 등을 연결시켜 줄 듯도 한데, 우리의 학계는 아직은 아무것도 인정치 않고 있다.


 


[자료]무덤양식


고인돌무덤

청동기시대의 무덤양식으로는 고인돌·돌널무덤·독무덤[甕棺墓]·움무덤[土壙墓] 등이 새로 들어와 초기철기시대까지 그 전통이 이어졌다. 고인돌은 선사시대 유적 중 가장 특징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제주도를 포함한 한반도 전역과 일본 규슈[九州], 중국 랴오둥반도 등에 퍼져 있으나 한반도에 가장 조밀하게 분포되고 있다. 서유럽의 고인돌과 비슷한 것도 있으나 이들과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고,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과 한반도에서 독자적으로 발생한 무덤형식인 듯하다.
 
고인돌은 주검의 위치에 따라 크게 두 가지 양식으로 나뉜다. 판돌[板石]로 땅 위에 네모난 방을 만들어 주검을 넣고 그 위에 크고 넓은 돌을 얹은 탁자식(卓子式) 또는 북방식(北方式)과, 땅 밑에 판돌 및 깬돌[割石]로 널을 만들어 주검을 넣은 뒤 굄돌[支石] 또는 돌무지 위에 덮개돌을 덮은 바둑판식[碁盤式] 또는 남방식이 있다.
 
북한학계에서는 대표적인 출토지의 지명을 따라 전자를 오덕리형고인돌, 후자를 침촌리형고인돌이라고 부른다. 고인돌에는 민무늬토기·붉은간토기[丹陶磨硏土器]·반달돌칼·돌검·돌살촉이 묻혀 있는 것이 대부분이며, 비파형동검을 부장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체로 청동제품은 발견된 예가 많지 않다.
 
돌널무덤은 지하에 판돌 ·깬돌로 널[棺]을 만들고 판돌 및 나무판자로 뚜껑을 덮은 것으로, 대개 북방 시베리아 계통의 무덤 양식으로 보고 있다. 봉분(封墳)이 거의 보이지 않으며, 지역과 묻힌 자의 신분에 따라 형식과 껴묻거리의 양이 다르다. 여기에는 돌검·돌살촉·민무늬토기·붉은간토기·검은간토기·가지무늬[彩文]토기 등이 출토되며, 간혹 청동기도 함께 나온다.
 
충남 일대에서 발견되는 돌널무덤은 깬돌로 널을 만들고 구덩이의 윗부분을 돌로 채우는 특이한 형식으로, 한국식동검을 비롯한 청동거울, 각종 의기(儀器), 덧띠[粘土帶]토기, 검은간토기 등이 출토되어 지역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부여·공주 일대에서는 이 시대의 독무덤도 나오는데, 바닥에 구멍을 뚫은 일상용 토기를 바로 세워 묻고 아가리를 판돌로 덮은 형식이다.

고구려의 돌무지무덤 [積石塚(적석총)] =한반도 남방식 고인돌

돌무지시설을 한 점에서 침촌리형(남방식) 고인돌과 공통되므로, 원래 고인돌인 무덤이 후대에 상석이 없어져 돌무지무덤으로 된 가능성도 있다. 청동기시대 초기의 것으로는 랴오둥반도[遼東半島] 일대의 장군산(將軍山) ·노철산(老鐵山) ·우가촌 타두무덤 등을 들 수 있다. 돌무지 밑의 묘광 배치는 중심적인 주체가 없고, 시설규모 또한 특별한 무덤이 없으며, 부장품에서도 서로 차이가 없다. 따라서 무덤의 피장자는 가족이거나 서로 밀접한 혈연관계가 있는 구성원으로 보인다. 이처럼 피장자 사이에 부장품 및 무덤시설의 차별이 없는 돌무지무덤은 남한지역에서도 보이는데, 한강 상류의 춘천시 천전리(泉田里) 돌무지무덤과 제주시 용담동(龍潭洞) 돌무지무덤 등이 있다. 이들 무덤에는 부장품으로 토기편과 석촉 등의 석기류 몇 점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무덤은 다음 시기에 이르면 많은 사람이 묻히고, 중심과 주변 무덤구덩이 간에 부장품과 무덤시설에서 차이가 나는 무덤으로 변하는데, 랴오둥반도 다롄시[大連市]의 강상(崗上)과 누상(樓上)무덤이 대표적이다. 강상무덤은 동서 28 m, 남북 20 m의 직사각형 묘역 안에 23기의 무덤이 있는데, 판돌로 정성들여 만든 7호무덤 주변으로 자갈로 거칠게 만든 22개의 무덤구덩이가 배치되었다. 그리고 이들 주변의 무덤에서는 140여 명이 한꺼번에 화장(火葬)된 채로 묻혀 있고, 누상무덤(동서 30 m, 남북 24 m)에서도 1 ·2호 돌덧널무덤 주위에 있는 10개의 돌덧널에서 화장된 많은 뼈가 나왔다. 부장품으로 비파형동검을 비롯한 마구류 ·수레부속 ·방패 ·활촉 ·도끼 ·끌과 각종 장신구가 나옴에 따라 북한학계에서는 이들 무덤을 수십 명의 노예를 순장한 노예소유자무덤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단계의 돌무지무덤은 이후 고구려와 백제 초기에 보이는 돌무지무덤으로 연결된다. 고구려는 건국 초부터 돌무지무덤을 조성하여 왔는데, 압록강의 지류인 훈강[渾江] 유역의 랴오닝성[遼寧省] 위안런현[桓仁縣]지방과 압록강 남안인 독로강(禿魯江) 유역의 시중군(時中郡) ·자성군(慈城郡) ·위원군(渭原郡) 등에 군집되어 있다. 초기에는 강가 모래바닥에 냇돌을 네모지게 깔고 널[棺]을 놓은 뒤 다시 냇돌을 덮는 정도의 간단한 구조였으나, 점차 냇돌 대신에 모난 깬돌[割石]을 써서 벽이 무너지지 않게 계단식(階段式)으로 쌓았으며, 돌무지의 외형은 대체로 방대형(方臺形)을 이룬다. 이것이 3세기 말~4세기 초가 되면 중국계 돌방무덤[石室墓]의 영향을 받아 퉁거우현[通溝縣]에서도 돌무지무덤의 중심부에 널길[羨道]이 달린 돌방[石室]을 만들게 된다.
 
일부 지배계층의 돌무지무덤에 있는 장대한 돌방은 쌍실(雙室)로 만든 것이 많은데, 이것은 부부(夫婦)합장인 것으로, 그 대표적인 예로는 장군총(將軍塚) ·태왕릉(太王陵) ·천추총(千秋塚) 등이 있다. 이들 돌무지무덤은 5세기 전반 평양천도(平壤遷都) 이후 차츰 쇠퇴하여 자취를 감추었다. 한편, 한강 유역에서도 돌무지무덤이 나오는데, 이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백제 때의 것으로 초기 백제의 지배세력이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강 지역에서는 무기단식이 보이지 않는데, 이것은 기단식을 축조할 시기에 고구려 세력이 이주해 왔거나, 아니면 하천 근처에 있던 무기단식 돌무지무덤이 모두 물에 의해 없어진 때문일 것이다. 백제의 돌무지무덤의 특징은 고구려 재래식 무덤형태로 얕은 대지 위에 네모난 돌무지를 층층이 쌓아올리고 가운데 주검을 넣은 형식으로, 제일 아래 단(段)의 네 변에는 돌이 무너지지 않도록 버팀돌을 설치하였는데, 1변이 50 m가 넘는 것도 있다.
석촌동 3호분은 크게 파괴되었지만 1974년, 83년, 84년의 발굴에 의하면 동서 55.5 m(불확실), 남북 43.7 m의 대형 돌무지무덤으로 제1단은 가에 큼직한 판석을 놓고 그 위에 작은 판석을 한두 겹 얹고 그 안쪽에 크고 작은 막돌을 메운 것이다. 4호분의 경우는 3단의 기단식돌무지무덤으로 위에 돌방과 형식상의 널길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돌방무덤 이전의 단계로 돌무지무덤으로서는 가장 발전된 단계이며, 환인현 고력묘자(高力墓子) 제11호분과 아주 비슷하다. 그 연대는 모두 4,5세기 정도로 여겨진다.
 
한편, 냇돌을 쓴 고식(古式) 돌무지무덤이 한강 상류인 양평군 문호리, 춘천시 중도, 제천시 교리 ·도화리 등의 남한강 유역에서 보인다. 문호리의 것을 예로 들면 1변 약 10 m, 높이 2.7 m 정도의 네모무덤[方形墳]으로 강가에 냇돌을 깔고 아마 세 사람의 시체를 놓은 다음 직접 냇돌을 3단 피라미드형으로 쌓은 것으로, 고구려 돌무지무덤의 가장 오래 된 형식과 통한다. 이상과 같은 한강유역의 돌무지무덤들은 고구려 무덤일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으나, 압록강 ·대동강 지역과 한강 유역 사이가 돌무덤 분포상 단절되었으므로 역시 백제 초기의 백제고분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그곳에서 출토된 김해토기 ·철제무기, 퇴화된 민무늬토기편들로 보아 그 연대는 2, 3세기로 짐작되는데, 이 유적은 백제 초기인 한성도읍시대의 연구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피라미드

피라미드는 4각형의 토대에 측면은 3각형을 이루며, 각 측면이 한 정점에서 만나 방추형을 이루도록, 돌이나 벽돌 등을 쌓아 만든 구조물로서, 주로 기념비적 성격을 지닌다. 경우에 따라 측면이 사다리꼴을 이루어 꼭대기가 평평한 것도 있으며, 측면이 계단 형식으로 이루어진 것도 있다. 여러 지역에서 여러 시대에 걸쳐 건조되었는데, 주로 이집트, 수단, 에티오피아, 메소포타미아, 동아시아, 멕시코, 남아메리카, 지중해 연안 지역 등 고대 문명권에서 발굴되었으며, 현재 발굴 중이거나 구조물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유적지만 발굴된 곳도 있다. 이 중 이집트, 멕시코, 남아메리카의 피라미드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국왕, 왕비, 왕족 무덤의 한 형식으로서, 그 어원은 그리스어인 피라미스(pyramis)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를 ‘메르(mer)’라고 불렀으며, 아랍어로는 ‘아흐람(Ahram)’ 복수는 ‘아흐라마트(Ahramat)’이다. 이집트 피라미드로는 현재 80기(基)가 알려져 있으며, 이 중 대부분이 카이로 서쪽 아부 라와슈(Abu Rawash)에서 엘-라훈(el-Lahun)에 이르는 남북 약 90 km인 나일강 서안 사막에 점재해 있다. 그러나 많은 수가 붕괴되어 벽돌 혹은 돌로 이루어진 산의 형태만 갖추고 있거나, 심지어 흔적만 남아 있는 것도 있어, 옛날의 모습을 남기고 있는 것은 의외로 적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기자(Giza)의 쿠푸, 카프레, 멘카우레 파라오의 피라미드로 가장 규모가 크다.
피라미드에 대해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BC 5세기)의 《역사》 권2에 있다. 그는 이집트 기자(Giza)의 대(大)피라미드에 관하여 10만 명이 3개월 교대로 20년에 걸쳐 건조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중세의 기록도 다소 남아 있다. 근세에 이르러 천문대설 ·창고설 등 공상적 ·신비적인 해석도 가해졌으나, 학술적으로는 나폴레옹 원정 때 조사단에 의한 《이집트지(誌)》가 돋보인다. 19세기 말 이래 피트리, 보르하르트, 라이스너 등의 조사로 과학적 해명이 이루어졌다.
 
수단에는 나파타(Napata)와 메로에(Meroe)에도 피라미드가 있다. 전자는 BC 8~BC 7세기의 쿠시 왕조의 것으로 18기, 후자는 BC 3세기 이후 악숨 왕조의 것으로 추정되며  약 50기가 있다. 모두 분묘로 건축된 것이며, 사면각도가 아주 급한 것이 특징이다.
 
중남부 아메리카의 피라미드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중부 멕시코의 테오티우아칸(Teotihuacán)에 있는 태양 피라미드와 달 피라미드, 치첸이자(Chichen-Itza)에 있는 카스티요, 그밖에 안데스 산맥의 촌락에 남아 있는 잉카 문명과 치무 문명의 유적이다. 아메리카의 피라미드는 보통 흙으로 쌓아 표면에 돌을 입힌 것으로 전형적으로 계단식이며 꼭대기에 대좌나 신전을 올린 것이 특징이다.

5천년 전 고대 한국인들의 피라미드

내몽골, 만주, 북중국 지역에 가면 정체불명의 피라미드들이 수 없이 서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것은 100개 이상이다. 평균 25 ~ 100 m 높이의 피라미드들이다. 그 중에는,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츠 빌딩과 맞먹는 300 m의 높이를 가진 것도 있다. ( 63 빌딩의 거의 2배 가까운 높이 ) 이집트의 기자 피라미드보다 거의 2.3배 정도 높고, 면적 또한 여의도보다 큰 거대한 건축물이다. 이런 것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고대의 기술로는 연인원 100만명이 소요된다고 한다.

최초의 발견은, 1945년에 인근을 비행하던 미국 수송기 조종사의 사진촬영과 보고서에 의해서이다. 그 이전까지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산으로 알고 있었다.

1963년에,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이들 거대한 피라미드를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무덤으로 예상하고 발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73년에 실시된 고고학계의 탄소 연대 측정법에 의해, 그 거대한 피라미드는 진시황의 무덤보다 수 천년 앞서 만든것 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현재, 이들 유적들은 중국 공안 당국에 의해 철저하게 숨겨지고 있다. 학술적인 조사도 불가능하며 중국에 의한 연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독일의 고고학자인 `하우스돌프`씨는 피터 크랴샤 라는 친구와 함께 여행객으로 가장하고 평상시 잘 알고 지내던 중국의 시 관광부 장관과의 긴밀한 관계를 이용해 외국인 금지 구역으로 묶여있던 북중국 일대의 피라미드들을 몰래 사진으로 담는데 성공하였다.
 
그 후 중국 공안당국은 촬영사실을 알아내고 하우스돌프씨와 친구를 검거하여 카메라 및 필름 등을 압수하였으나, 다행히 촬영 직후 곧바로 모든 사진들을 독일로 보내, 서방세계에 북중국의 피라미드들을 알리는데 성공하였다. 세계역사를 다시 써야 하는 21세기 최고의 고고학 발견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미국과 유럽의 수 많은 서구의 고고학자들이 중국 정부에 발굴을 허가해 달라는 공문과 압력을 수차례 보냈다. 처음에는 중국정부에서는 북중국 및 만주땅에는 옛날부터 야만민족과 기마민족들이 살았던 곳이라 진보된 문명이 없다고 말하고 , 독일학자의 사진과 보고서는 조작된 것 이라고 발뺌 하였다. 하지만 야만민족이나 기마민족이 만들기에는 너무나도 정교하고 웅장하여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아무튼, 그런식으로 계속 발뺌해오던 중국정부에서는, 계속되는 서구학자들의 발굴요구 및 서구 케이블 TV에서 몰래 중국에 잡입하여 카메라로 찍어 서구사회에 방송하는 노력에 힘입어 , 최근에 중국의 일부학자들이 그 존재를 인정하고 아직 발굴기술과 유물 보존기술이 부족해 다음세대로 그 발굴을 연기하게 되었다는 말만 살짝 흘렸다고 한다. 그 발표와 함께 10년전부터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역사에 편입시켜 자국학생에게 가르치고 전 세계에 고구려 역사가 중국역사라고 홍보하고 있는 중이다.
 
보시는 바와 같이, 북중국의 피라미드들은 위로갈수록 낮아지고 계단식 형태의 모양을 띄는 만주와 한반도에 널려있는 고구려의 무덤과 너무나도 똑같은 모양과 형태를 가지고 있다. 학계에서는 이러한 건축공법을 들여쌓기 공법이라고 부르며, 중국과 일본에는 찾아볼 수 없는 고구려 고유의 건축공법이라는데 의의를 다는 학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면, 이 5,000년 전에 이 지역에서 이런 문명을 가진 집단은 누구일까?
 
중국인인가? 아니다. 중국인은 황하 유역에서 농사짓고 청동기 만들고 있었다. 몽골인인가? 아니다. 몽골인들은 당시 존재도 없었다. 거란족? 오환족? 이들은 완전 유목민으로서, 정주 문명과 관계없다. 여진족? 이들도 유목민이다. 5,000년 전에 이 지역에 관계된 국가나 민족은 누구인가? 모든 역사책에는, 이 지역에 단군 조선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아직은 추측에 불과하며 충분한 조사와 연구가 이루어진 후에 밝혀질 일이다. 아무튼, 고구려 및 고조선 등과의 연관성은 배제하더라도, 중국이 이 유적들을 애써 감추고 있는 것은 석연치 않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