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흔적따라

[코리안루트를 찾아서](1)中·한반도·日문명의 젖줄 ‘발해문명’

wowjenny 2011. 1. 28. 23:07

 

[코리안루트를 찾아서](1)中·한반도·日문명의 젖줄 ‘발해문명’ (03' 39")

경향신문 | 17 | 2007-10-07

[코리안루트를 찾아서](1)中·한반도·日문명의 젖줄 ‘발해문명’

석성, 돌무덤, 빗살무늬토기, 옥기

경향신문 탐사단은 7월27일부터 5일간 동양문명의 서막을 연 다링허·랴오허 일대를 돌아보았다. 국내언론사상 처음 있는 취재이니만큼 만만치 않은 여정이었다. 탐사단은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발굴이 끝나 아직 국내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유적(싼줘뎬 석성)도 보았다. 이외에도 청쯔산, 싱룽와 유적, 차오마오산(草帽山) 제사유적 등도 전문가들의 발길을 쉽게 허락치 않은 궁벽한 곳에 놓여 있다. 한데 전혀 낯설지 않았다.

차하이와 싱룽와 유적에서 확인된 ‘갈지(之)자·사람 인(人)자 빗살무늬 토기’는 우리 신석기문화의 전형적인 유물이 아닌가. 또한 영생불멸의 상징인 옥결(玉?·옥으로 만든 귀고리)은 차하이-싱룽와 유적부터 훙산문화까지 도배하다시피했다. 이형구 교수는 “옥결은 최근 한반도 동해안 고성 문암리(BC 6000년)에서도 나왔다”면서 “엄청난 규모의 돌무덤과 제단, 신전인데 석관묘, 석실분, 적석총 등 돌무덤은 우리 민족의 고유 묘제”라고 설명했다.

훙산문화의 대표 유적인 뉴허량에서는 수장(首將)의 것으로 보이는 큰 적석총과 27개의 석관묘가 확인됐다. 이 양식은 고구려·백제의 적석총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뉴허량 유적 바로 곁에 있는 직경이 100m가 넘는 돌로 쌓은 대형 피라미드(금자탑)도 이번에 직접 보았다.

또한 뉴허량 유적에는 조상신과 하늘에 제사 지낸 원형 제단이, 인근 구릉에서는 지모신 신앙의 상징인 여신묘와 여신상이 각각 확인됐다. 이런 여신상은 랴오허를 거쳐 랴오둥 반도와 한반도에서도 두루 보인다.

확인된 치(雉)만 13개나 되는 어마어마한 츠펑 산줘뎬(三座店) 석성(BC 2000~BC 1200년). 고조선의 성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고구려 백암성과 백제 계양산성 등과 축조기법이 똑같다. 지난해 발굴이 끝났으며, 이번에 경향신문 탐사단이 처음 공개하는 것이다.

13개 치(雉)가 달린 석성은 고조선?

이밖에 싼줘뎬과 청쯔산에서 확인한 석성과 제사유구, 주거지 등을 본 이형구 교수는 “어쩌면 이렇게 우리 고유의 축성술과 같은지 모르겠다”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싼줘뎬 석성은 확인된 치만 13개나 되는 견고한 석성이었다. 청쯔산 역시 ‘고국(古國)이 존재했던 곳’이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하가점 하층문화(BC 2000~BC 1200년)에 속하는 이 유적들은 과연 고조선과의 연관성은 없는 것일까.

이형구 교수는 “산 위에 이런 큰 규모의 돌을 운반할 동원력이라면 전제권력을 갖춘 국가였을 것”이라면서 중원 하나라 시기에 동이족 국가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복기대 단국대박물관 연구원은 아예 “고조선 유적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은 이렇게 동이족, 그 가운데서도 우리 민족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발해문명을 어떻게 ‘요리’하고 있을까. 훙산문화 발굴을 담당하고 있는 쉬쯔펑(徐子峰) 츠펑대 교수는 “황허문명은 농업 중심의 문화였고, 랴오허문명은 신권 중심의 복합문화였다”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확실하게 정리했다. 다만 랴오허문명과 황허문명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는 것.

〈츠펑·차오양·선양|이기환 선임기자 lkh@kha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