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흔적따라

일본 대지진, 백제 문화유산에도 생채기

wowjenny 2011. 4. 4. 09:46
일본 대지진, 백제 문화유산에도 생채기

한겨레신문 | 기사전송 2011/03/28 20:36

 

 

» 8세기 백제 유민 경복이 지방관으로 통치했던 다가조 유적의 정청터(왼쪽). 오른쪽은 이번 대지진으로 금이 간 정청터 정전의 기단부 상면 부분을 확대한 사진이다.

 

 일본 동북 지방 대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일본 센다이 인근 마쓰시마 명승지구의 지진 이전 풍경. 

 

 

 

[한겨레] ‘3대 절경’ 마쓰시마 다도해
지반 침하·교량 붕괴 피해커
다가조 고을터 곳곳엔 균열

 

일본 대지진의 참화 앞에서 문화유산 역시 온전하지 못했다. 8세기 백제 의자왕 후손 경복(697~766)이 다스리며 금을 캤던 다가조의 고을터도, 17세기 일본 전통시 하이쿠의 달인 마쓰오 바쇼(1644~1694)가 천하의 경치로 극찬했던 마쓰시마 명승지구도 대지진, 쓰나미의 발톱은 비켜가지 않았다. 2차대전 이후 최대의 피해를 입힌 일본 동북지방 대지진은 미야기현 센다이 근처의 일본 3대 절경 마쓰시마를 할퀴고, 백제 유민들 자취가 어린 다가조 특별사적에도 상당한 피해를 줬다. 한국과 관련된 유적지여서 국내 학계에서도 이 지역의 피해상황을 우려하고 있다.

<아사히> <요미우리> 등 현지 신문 등을 보면, 센다이 인근 마쓰시마만에 260여개 섬들이 다도해를 이루는 특별 명승 마쓰시마는 지난 11일 일어난 지진과 쓰나미로 일부 섬들의 지반이 무너지고, 섬들을 잇는 다리가 망가졌다. 또 지역내 국보급 사찰 즈이간사는 공양간 등 건물 벽 일부가 무너지고 큰 균열이 생긴 것으로 확인됐다.

즈이간사는 17~19세기 동북 지방을 지배했던 영주 다테 마사무네 가문(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에도 참전했다)의 원찰로, 지진에 마사무네의 청동상과 후대 번주의 위패 등이 훼손됐다. 다만, 만 일대 들어찬 섬들이 방파제 구실을 한 덕분에 해일 피해는 다른 지역보다 비교적 적은 편. 섬의 상당수 문화재와 마쓰시마 박물관은 쓰나미의 직접 피해는 모면했다고 한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마쓰시마 섬들이 재해에서 우리를 지켰다”는 말들이 돈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국내 학계의 관심이 쏠리는 센다이시 북동쪽 다가조 유적은 현지 조사 결과 핵심인 정청(옛 행정기관) 정전터 기단부의 포장과 돌부재 등에서 폭 5㎝ 전후의 균열이, 다른 관청터 유적 동쪽 경사면 일부에도 폭 5m나 되는 균열이 생겼다. 또 경내 일부 유적 계단 디딤돌이 지진 충격으로 어긋나는 현상도 관측됐다. 다가조 유적 조사 연구소의 후루카와 연구원은 <한겨레>에 보낸 전자우편에서 “눈에 띈 피해사례는 4건으로 당장 큰 문제는 보이지 않지만, 정밀 진단과 복구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다가조 유적은 고대 일본에서 변방의 중요 거점이었다. 8세기 초 일본 조정이 동북 개척과 원주민 에조(아이누인) 정복을 위해 행정기관을 설치한 이래 200~300년간 변방 도시로 융성했다. 1960년대부터 정청터와 관청터, 마을터 등이 잇따라 발굴됐고, 현재는 특별사적 공원으로 개방되어 있다.

특히 이 유적은 8세기 초 백제 유민 출신 경복이 지방관으로 다스렸던 곳이어서 한반도와 인연이 깊다. 749년 경복은 이 지역의 고가네야마에서 백제 장인들을 동원해 일본 역사상 처음 금 900냥을 캐내 조정에 바쳤는데, 이 사실이 중요 사건으로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바친 금이 당시 일본 왕실이 국운을 걸고 추진했던 도읍 나라의 큰 절 도다이사(동대사)의 대불상에 입혀지면서 대불사가 원만히 끝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왕(쇼무왕)은 이 지역에 조세를 면제하고 경복을 형부경(법무부 장관)에 중용할 정도로 높이 평가했다고 전한다. 실제로 유적에서는 경복의 친필로 추정되는 명문뿐 아니라 그의 행적이 기록된 목간(나무쪽 문서)들이 발굴된 바 있다. 고가네야마 유적이 있는 와쿠야초에도 1994년 전시관이 세워져 백제인들의 금 채굴과 관련된 사료들을 전시중이다.

신희권 문화재청 학예관은 “2006년 풍납토성 국제학술회의 때 일본 연구자를 초청해 다가조 유적의 실상을 처음 소개한 바 있다”며 “전화 사정이 열악해 상세한 현지 피해 상황과 복구 계획 등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게 안타깝다”고 말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일본 도호쿠역사박물관 제공 <한겨레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