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흔적따라

"몽촌토성은 석회로 쌓은 성곽"

wowjenny 2011. 4. 1. 16:03

 

"몽촌토성은 석회로 쌓은 성곽"


몽촌토성


심광주 박사 "삼국사기 '증토축성' 증명"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이에 나라 사람들을 모두 징발해 '증토축성(烝土築城)'케 하고 궁실과 누각과 보루 등을 지으니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은 데가 없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21년(475) 조(條)에 보이는 기록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런 대규모 공사로 국고가 고갈돼 결국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침략을 받아 수도 한성(漢城)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포로로 잡혀 참수되는 크나큰 치욕을 겪는다.

이 기록에 보이는 '증토축성'이란 말은 글자 그대로는 흙을 쪄서 성곽을 만든다는 뜻이지만 도대체 흙을 어떻게 찌며, 그렇게 찐 흙을 어떻게 쌓는지, 그리고 이렇게 쌓은 성이 도대체 어디인지 등등은 모두 역사의 베일에 가려 있다.

하지만 역사고고학 전공인 토지주택박물관 문화재지원팀장 심광주 박사는 증토축성은 중국의 역사에 견주어 볼 때 석회를 사용해 쌓은 견고한 성곽을 말하며, 이때 개로왕이 쌓은(혹은 수리한) 성곽이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내에 있는 몽촌토성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최근 제기했다.

심 박사는 서울시사편찬위원회 기관지인 '향토서울' 최신호(76호)에 기고한 '한성백제의 증토축성에 대한 연구'라는 논문에서 '증토축성'에서 증토(烝土)란 석회에 물을 부어 소석회(消石灰)를 만드는 과정에서 생기는 열과 수증기를 묘사한 말이며, 백제 성곽 중 이런 석회를 섞어 쌓은 성곽이 몽촌토성이라고 주장했다.

심 박사에 따르면 몽촌토성은 올림픽경기장 조성과 관련해 1984년 숭전대(숭실대)가 북동쪽 성벽 두 군데를 절개해 조사한 결과 석회가 포함된 판축(板築)성벽임이 확인됐다.

즉, 당시 조사결과 지표3.6m 깊이의 성벽 판축층에서 두께 약 50㎝인 석회 포함층 2개가 드러났다는 것이다.

몽촌토성 성벽과 해자


한반도를 포함한 고대 동아시아 세계에서 석회는 처음에는 조개껍데기를 분쇄해 만들어 사용하다가 중국에서 5호16국 시대에 흉노족인 혁련발발(赫連勃勃)이 대하(大夏.407~431) 왕조를 세우고 그 도읍에 건설한 통만성(統萬城)을 쌓을 때 바로 자연산 석회를 이용하기 시작했다고 심 박사는 전했다.

심 박사는 한국사 기록에는 오직 한 번밖에 안 보이는 '증토축성'이라는 용례가 중국에서도 오직 혁련발발에 의한 통만성 건설 관련 기록에만 보인다는 점을 중시하면서, 아울러 이런 통만성이 발굴조사 결과 생석회를 섞어 사용한 성곽으로 드러난 점을 주목했다.

중국 역사서들에 따르면 혁련발발은 네이멍자치구와 인접한 지금의 산시성(陝西省) 북부에 통만성을 쌓으면서 그것을 "증토축성케 하고는 송곳이 1촌이라도 들어가면 그것을 만든 자를 죽여 함께 쌓았다"고 한다.

심 박사는 '증토축성'한 통만성 축조 사정을 고려할 때 백제 개로왕이 증토축성했다는 성곽도 석회를 개어서 지금의 시멘트벽과 같이 견고하게 쌓은 성곽일 수밖에 없으며 발굴성과로 볼 때 몽촌토성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심 박사는 한성백제가 석회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원주 법천리 고분과 판교 9호 석실분에서 조개를 재료로 한 석회가 확인된 점을 고려할 때 최소한 4세기 말 이전으로 추정되며, 석회석을 이용하는 방식은 5세기 무렵에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몽촌토성은 평지 토성이자 한성 도읍기 백제 왕성임이 확실한 풍납토성에서 남쪽 1㎞ 지점의 해발 50m 내외의 자연 능선을 이용해 쌓은 성곽으로 전시 같은 비상사태에 백제 왕이 농성하는 곳으로 활용한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한성백제의 몽촌토성은 고대 시멘트인 강회로 쌓은 것"

성곽 전문가 심광주씨 "삼국사기에 나오는 증토축성의 '증토'는 강회" 주장

오미환기자 mhoh@hk.co.kr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안에 있는 몽촌토성의 산책로. 한성백제가 쌓은 이 성은 토목기술 수준이 매우 높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울 송파구의 올림픽공원 안에 있는 한성백제의 몽촌토성이 고대의 시멘트인 강회로 쌓은 것이며, 이 기술이 한성백제의 멸망 직전 중국에서 들어왔다는 주장이 나왔다. 석회석을 800도 이상의 고온에 구운 생석회에 물을 부으면 엄청난 열과 수증기를 뿜으며 가루(소석회)가 되는데 여기에 진흙과 모래를 섞어 단단하게 만든 것이 강회다. 강회는 굳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석고 등을 섞어 빨리 굳게 만든 것이 시멘트다.

삼국시대 성곽 전문가인 심광주 토지주택박물관 문화재지원팀장은 서울시사편찬위원회가 펴내는 <향토서울> 최신호(76호)에 발표한 '한성백제의 증토축성에 대한 연구'논문에서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개로왕 21년(475)조에 나오는 증토축성(烝土築城ㆍ 흙을 쪄서 성을 쌓는다는 뜻)의 증토가 강회를 가리키는 것이며, 한성백제의 마지막 왕인 개로왕이 몽촌토성을 보수할 때 강회가 쓰였다고 주장했다. 이 기록은 개로왕이 벌인 대규모 토목공사에 관한 것으로 "이에 나라 사람들을 모두 징발해 증토축성케 하고 궁실 누각 보루 등을 지으니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은 데가 없었다"고 씌여 있다.

심씨는 "당시 한반도에서 강회를 쓴 것은 백제가 유일하며, 이는 백제의 토목기술이 삼국 중 가장 앞섰음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석회는 고구려 고분에도 쓰였으나 조개껍데기를 분쇄한 것이어서 강도가 약해 벽에 발랐을 뿐 벽을 쌓거나 지반을 다지는 등 건축용은 아니었고, 신라도 한성백제 멸망 후인 6세기까지 조개껍데기 석회를 썼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국내 학계는 흙을 찐다는 것이 어떤 기술이고 어디에 쓰였는지 알지 못했다. 1984년 구 숭전대(숭실대)가 몽촌토성의 동쪽 성벽 두 군데를 절개해 조사했을 때 땅속에 묻힌 성벽에서 석회가 포함된 판축(板築ㆍ널판지를 대고 흙을 다져 쌓는 것) 2개층을 확인했으나 석회의 정확한 성분 분석은 없었다.

심씨는 한국사에서 증토축성이라는 표현이 삼국사기의 이 기록뿐이고 중국사에서도 흉노족인 혁련발발의 대하왕조(407~431)가 쌓은 통만성 관련 기록에만 나오는 것으로 보아 강회 기술이 중국에서 들어왔다고 추정한다. 중국 역사서들에 따르면 대하왕조는 지금의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와 인접한 산시(山西)성 북부에 통만성을 "증토축성하면서 송곳이 1촌이라도 들어가면 그것을 만든 자를 죽여 함께 쌓았다." 대하왕조가 북위에 의해 멸망한 뒤 증토축성 기술은 북위로 넘어갔는데 한성백제가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해 468년 북위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면서 이 기술을 도입하게 됐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한성백제는 당시로서는 첨단인 이 신기술로 472~474년 경 몽촌토성을 보수했지만 475년 고구려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개로왕이 고구려 간첩인 승려 도림의 계략에 빠져 나라의 위신을 세운다며 도성 리모델링 등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이는 바람에 국고가 거덜나고 국력이 쇠한 결과였다. 이후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해 명맥을 이어갔다.

 

<저작권자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입력시간 : 2011/01/10 21:12:55 수정시간 : 2011/01/10 23:44: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