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구한말 사진을 보면 숭례문 주변에는 민가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조선 초부터 숭례문 주변은 육의전 등이 위치한 상업지구로 민초들의 최대 생활 근거지였습니다.
조선 초 성종은 이 때문에 숭례문 옹성 증축을 불허하기도 했습니다.
[만약 옹성을 쌓게 되면 마땅히 민가를 헐어야 하니, 빈궁한 자가 어떻게 견디겠는가. 그러니 쌓지 말게 하라.]
하지만 19세기 초 일제는 철길을 놓고 일본 황태자가 방문한다는 이유로 숭례문 성벽과 민가들을 훼손하고 철거했습니다.
숭례문 복원 발굴과정에서 민가 터와 원래의 성벽 모습들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곳 민가 터에선 아궁이뿐만 아니라 여러 자기 그리고 동물뼈들이 발굴돼 조선선말 주점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조선 전기까지 숭례문 주변 도로는 지금 높이의 2m 가량 아래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후 다시 도로를 단단히 다지는 과정에서는 예닐곱 겹으로 1m 이상 땅을 켜켜이 다지고 그 위에 넓은 돌을 깔아 정교하게 정비한 흔적도 발견됐습니다.
[신희권/국립문화재연구소 : 지금 한 1.5m 정도를 여러가지 흙을 섞어서 다졌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조선 후기에 사용됐던 그러한 박석의 도로면이 지금 얹혀져 있는 그러한 양상입니다.]
문화재청은 2010년까지 발굴조사와 복원공사를 함께 벌여 숭례문뿐만 아니라 주변 성곽 등을 원형대로 복원할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