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은 강원도 화천군 원천리 ‘4대강 살리기 북한강 사업구간 12공구’ 내 연꽃단지 조성지 1만7500㎡ 현장 발굴 설명회를 3일 열었다.
예맥문화재연구원(원장 정연우)이 5월 말부터 발굴을 시작해 60% 가량 조사를 마쳤다. 현재 철기~삼국시대 주거지 약 120기, 청동기시대 주거지 23기, 수혈(구덩이) 약 120기 등 265기의 유구가 발굴됐다.
이번 유적에선 광구단경호(입구가 넓고 길이가 짧은 토기), 무뉴식(꼭지가 없는)뚜껑, 흑색마연토기 등 한성백제기(BC 18~AD 475) 토기가 출토됐다. 이들 토기는 한성백제 도읍지인 풍납토성 중심부, 석촌동 고분군 등 백제 왕성이나 왕릉에서 출토된 바 있다.
특히 그을음을 섞은 옻칠을 해 검은색을 낸 흑색마연토기는 생활용기가 아닌 의례용기다. 정연우 원장은 “한성백제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지배층이 직접 가지고 왔거나, 토착 지배자가 하사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강원도 화천군 원천리 한성백제 유적지에서 출토된 각종 토기. [예맥문화재연구원 제공]
문화재청 신희권 학예연구관은 “백제 초기 동쪽 경계가 철원보다 동쪽에 위치한 화천에까지 이르렀음을 입증하는 고고학적 증거가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북한강 상류 강원도 지역에서 학술적으로 의미 있는 삼국시대 유적이 발굴된 바는 없다. 신 연구관은 “강원도 일대에선 삼한시대~백제 초기 유적이 나오지 않아 고고학계에선 이 지역엔 철기시대만 있었던 것으로 봤다”고 말했다.
이 밖에 철제 괭이U자형 삽날 등 농기구, 철제 화살촉·창 등의 무기류, 마갑(말의 갑옷) 조각, 재갈과 등자(발걸이) 등도 출토됐다. 마구류는 남부지방에선 출토된 바 있지만 중부지방에선 발굴된 바 없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초기 낙랑·말갈과 전투를 벌였다는 기사가 수십 차례 나온다.
예맥문화재연구원 심재연 책임연구원은 “철제 무기류는 최근 20년 간 강원도에서 출토된 모든 유물을 합친 양보다 많을 정도”라며 “평소 농사를 짓다가도 전쟁이 나면 싸워야 했던 접경지대의 특징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번 발굴로 연꽃단지 조성 계획은 백지화될 전망이다. 문화재청은 올해 안에 문화재위원회를 열어 유적의 보존방안을 마련할 예정이다.
화천=이경희 기자
화천 백제마을은 군사전초기지 주거지서 무기류 다량 출토…초기 백제영토 확대해야 | ||
기사입력 2010.11.03 17:07:21 |
올해 초까지 경작지였던 이곳은 지난 3월 3~4세기 한성백제로 추정되는 집터 120기가 발견되면서 올해 고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지역이 됐다. 북한강 상류지역에서 백제 취락 마을이 대규모로 발견된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3일 찾은 이 유적지는 발굴작업이 후반부로 접어들어 마을 성격을 보다 뚜렷하게 알 수 있었다. 수장급이 살았던 집으로 추정되는 `2지구 1호 주거지`는 규모가 가장 컸으며 검게 그은 판자벽과 부뚜막이 눈에 띄었다. 다른 주거지 안에는 `등자`와 `재갈`을 비롯한 마구류와 `화살촉` 등 무기류가 보관돼 있었다.
말 발걸이인 `등자`가 발견된 것은 중부지역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신희권 문화재청 발굴제도과 연구관은 "이 유적지에서는 무기류 100여 점이 출토됐다"며 "평화로운 농경 마을이 아니라 국경지역 교전이 빈번했던 군사 전초지 성격이 짙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기록에 따르면 한성백제 시절 말갈족은 수확기 때 노략질을 많이 한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 한성백제기를 특징짓는 흑색마연토기와 직구호류가 다량으로 출토됐다. 토기 표면 흑색에 옻칠을 한 `흑색마연토기`는 일반 생활용기보다는 특수 의례용기로 분류된다.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예맥문화재연구원 정연우 원장은 이날 현장설명회에 참석해 "이곳은 4대강(북한강) 살리기 사업 구간에 포함돼 연꽃단지와 자전거길 조성이 예정됐지만 올해 초부터 강변 충적대지 1만7500㎡를 발굴 조사한 결과 3~4세기 한성백제 취락지가 확실한 주거지와 유물이 출토됐다"고 설명했다.
발굴이 60% 진행된 결과 이곳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 23기, 석관묘 1기, 철기ㆍ삼국시대 주거지 약 120기, 수혈유구 약 120기 등 유구 265기가 확인됐다.
이번 발굴이 의미를 갖는 것은 백제 건국 초기 동쪽 영역을 춘천보다 북쪽인 화천까지 늘려 잡을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백제 영역 경계는 문헌상으로 주양(현재 춘천)설이 일반적이었지만 이마저도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지는 않았다.
백제시대 주거지는 공중에서 내려다본 형태가 한자 `철(凸)`자와 `여(呂)`자를 닮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呂`자형 집터 중 주된 생활공간인 큰방은 평면 형태가 대부분 육각형이었으며 그 뒤편 중앙에는 거의 예외 없이 부뚜막을 설치한 전형적인 백제 주거지 형태를 띤 것으로 나타났다.
[화천 = 이향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