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흔적따라

“17, 18세기 건축기술 보여준 王의 거처”

wowjenny 2013. 10. 17. 08:54

 

“17, 18세기 건축기술 보여준 王의 거처”
  경기문화재硏, 북한산성 행궁 內殿 100년만에 공개
▲  1915년 7월에 발생한 산사태로 매몰되기 전 북한산성 행궁의 모습. 1902년 일본인 세키노 다다시가 촬영한 사진. 이는 1904년 발간된 ‘한국건축조사보고’에 실렸다. 이 행궁은 남한산성 행궁 축조 이후 90여 년이 지나 조성되어 17∼18세기 건축기술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다.
▲  북한산성 행궁 내전영역 전경. 이번 발굴은 ‘북한지(北漢誌)’를 비롯한 사료의 기록과 거의 일치하는 구성으로 드러났다.
행궁(行宮)은 왕이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무르는 별궁(別宮) 또는 이궁(離宮)을 뜻한다. 조선시대에 들어 전란시 피란처(북한행궁·남한행궁·광주행궁), 능행차시 거처(화성행궁), 강무시 거처(철원행궁), 휴양소(온양행궁) 등의 목적에 따라 각지에 지어졌다. 그중 고양시가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중인 북한산성 행궁이 지난해 10월부터 진행된 1차 조사에서 내전영역을 새롭게 발굴했다. 1915년 산사태로 매몰된 지 100여 년만에 드러낸 모습이다. 조사를 진행한 경기문화재연구원측은 “1745년에 편찬된 ‘북한지’의 기록과 거의 일치한다”며 “행궁 원형 복원에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한다”고 전했다.

◆ 17∼18세기 높은 건축 기술 보여줘 = 내전은 왕이 거처하는 사적 공간으로, 집무를 보는 외전과 구분된다. 영조 21년(1745년) 승려 성능에 의해 편찬된‘북한지(北漢誌)’에 따르면 북한산성 행궁의 규모는 115칸. 이 중 내전영역은 54칸 규모로 내전, 좌우행각방, 청, 중문, 대문, 수라소, 측소로 구성돼 있다. 이번 1차 조사에서 발굴된 내전지는 가운데 마루와 좌우 온돌방을 갖춘 28칸 규모다. 어도와 대문, 외전지로 내려가는 계단이 좌우 행각으로 둘러싸여 있다.

조사를 진행한 경기문화재연구원 측은 “이 중심 건물들은 그 재료와 축조 방법이 당시 성숙한 건축기술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연구원은 또 “중심영역을 둘러싸는 배수로 처리와 후면 화계, 내전영역의 경계를 이루는 내·외곽담당지는 궁궐의 내전에 걸맞은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고 평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번 조사에서는 건축 석재와 용문·봉황문·수자문·거미문· 화문 등 막새기와, 치미·용두·잡상 등 기와류, ‘己巳(기사)’·‘辛訓(신훈)’ 의 글자가 새겨진 수키와를 비롯해 건축물에 사용한 철물이 다량 출토된 것으로 알려졌다.

◆ 숙종 37년에 착공한 북한산성…사적인 ‘왕의 거처’엔 어떤 왕들이 거했을까 = 북한산성(北漢山城·사적 제162호)은 ‘조선왕조실록’에 중흥산성(中興山城) 혹은 북성(北城)이란 명칭으로도 기록돼 있다. 북한산성은 숙종 37년(1711년) 4월 3일에 착수, 다음해 10월 19일에 완공된다. 또한 북한행궁은 산성 축조가 시작된 해 8월에 공사를 시작해 다음해 5월에 준공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행궁지는 북한산성 내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상원봉(上元峯)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북한동으로 오르는 북한산의 등산로를 따라서 대서문과 중성문을 지나 중흥사에서 청수동암문 방향으로 오르면 계곡부 경사면에 무너져 내린 축대가 보이는데, 이를 지나서 50m 정도 오르면 조사·발굴 지역에 이른다.

실제로 북한행궁에 행행(行幸·조선시대 임금이 궁궐 밖으로 거동하는 의식)했던 왕은 이를 준공한 숙종 외에 영조가 있다. ‘영조실록’ 96권에는 “임금이 북한산에 거동하였다가 육상궁(毓祥宮)에 역림하여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행궁에 행행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 1915년 산사태로 매몰된 행궁지, 사료기록이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까닭 = 북한행궁 내전영역은 ‘북한지’등 사료의 내용과 거의 대부분 일치하는 모습으로 확인됐다. 연구원은 “1915년 전후 수해로 붕괴되었을 당시의 모습 그대로 발굴되었다”며 “한마디로 역대 발굴된 행궁지 중에서 가장 잘 보존된 것이라 할 수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행궁은 북한산 내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립공원 내에 위치하여 후대에 훼손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분석된다. 따라서 조선 후기 건물지의 난방과 배수시설에 대한 완벽에 가까운 실증자료로 쓰일 것으로 평가된다. 박현욱 경기문화재연구원 연구원은 “북한산성 행궁의 원형 복원을 가능케 해준다는 학술적 의미가 크다”고 전했다.

연구원 측은 이번 1차 조사발굴 결과 발표와 함께, 북한산성 행궁의 실제 옛 모습을 가늠케 하는 두 장의 사진을 함께 공개했다. 하나는 1902년 일본인 세키노 다다시(關野貞)가 북한산성 행궁에 방문하여 촬영한 것으로, 1904년 발간된 ‘한국건축조사보고’에 수록돼 있다. 또 다른 사진은 1937년 일제강점기 시기에 조선지방행정학회가 편찬한 ‘경기지방의 명승사적’에 실린 것으로 북한산이궁(北漢山離宮)이라는 명칭으로 소개되었다.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사진 = 경기문화재연구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