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흔적따라

일 왕가의 1급보물, 백제가 만들었다?

wowjenny 2012. 10. 30. 22:34

 

일 왕가의 1급보물, 백제가 만들었다?



[한겨레] 쇼소인 소장 코발트빛 유리잔

“백제 금동항아리 무늬와 닮아”

나라박물관 학예관 논문 발표

‘서역 계통’ 견해와 달라 주목


높이 12㎝, 우아한 동그라미 무늬를 몸체 곳곳에 붙인 채 코발트빛을 내뿜는 1300여년 전 유리잔(유리배)의 고향은 어디일까. 일본의 고대 도읍 나라에 있는 일본 왕가의 보물 창고 쇼소인(정창원)에 소장된 일급 보물 유리잔의 제작지와 유래된 경로를 놓고 한·일 문화재 학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한눈에도 서역풍이 느껴지는 이 유물이 백제에서 만들어져 일본에 전래됐다는 일본 현지 전문가의 연구 결과가 발표됐기 때문이다.

이런 견해를 발표한 전문가는 지난 27일부터 이 유리배가 포함된 쇼소인 소장품 특별전(11월12일까지)을 열고 있는 일본 국립나라박물관의 학예관인 나이토 사카에다. 그는 이번 전시 도록에 유리배를 분석한 논문을 싣고, 다리받침 등의 문양과 제작기법상 백제에서 장인들이 가공해 들어왔을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이 코발트빛 잔은 그동안 한·일 학계에서 서역 페르시아 계통의 양식을 지닌 유물로 실크로드 교류의 산물로 입수됐다는 견해가 유력했으나, 백제 가공설이 제기됨에 따라 두 나라 학계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나이토가 유리배의 백제 가공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짚은 것은 독특한 무늬 기법이다. 잔 아래 금속받침 부분의 역동적인 소용돌이 모양의 당초문(덩굴 무늬)이 2009년 전북 익산 미륵사지 탑 기단부에서 발견돼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7세기 백제 말기 금동제 사리항아리의 어자문(작은 생선알 모양을 채워 새긴 무늬)과 쌍둥이처럼 닮았다는 점을 주목한다. 어자문은 6~8세기 당나라와 백제·통일신라·일본 등지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기법이지만, 작은 알 모양의 어자를 빽빽이 채우지 않고 성글게 채우면서 마치 괴수의 모양 같은 당초 무늬와 어울리도록 구성한 사례는 백제의 미륵사지 사리항아리의 무늬에서만 나타난다는 것이다. 또 유리 표면에 동그란 무늬를 덧붙여 장식미를 뽐낸 기법은 1958년 경북 칠곡 송림사 전탑 안에서 화려한 사리장식구 안에 든 채로 발견된 원 무늬 붙은 사리 그릇과 거의 유사하다. 나이토는 “백제와 일본 왕실의 밀접한 친분 관계로 장인들이 세공한 다수의 공예품을 일본에 선물로 보냈다는 점, 백제 멸망 뒤 다수의 왕족 장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점 등으로 미뤄 이 유리배는 백제에서 가공돼 들어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국내 학계 일부 연구자들도 설득력이 있다는 의견을 표시하고 있다. 불교미술사학자 한정호 동국대 교수는 “당시 백제 장인들은 금속 세공기술 측면에서 동아시아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었다”며 “미륵사지 사리항아리의 무늬 기법이 한반도만의 독창성을 띤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연구 결과”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큰 쟁점이 풀린 것은 아니다. 유리잔 자체를 백제에서 만들었는가는 시원히 해명되지 않았다. 나이토의 논문도 유리배의 유리는 유리를 발명한 서역 페르시아 계통이며 백제는 유리잔을 수입해 다리받침을 가공한 뒤 다시 일본에 건네줬을 것이라는 추정으로 끝을 맺고 있다. 그러나 국내 학자들은 송림사 사리그릇이나 부여 출토 유리공 등에서 드러나는 고도의 금속·유리공예 접합기법 등으로 미뤄 유리를 자체 제작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고 본다.

756년 쇼무 일왕의 애장품을 큰절 도다이사에 바치면서 시작된 쇼소인 역사에서 유리배는 언제 누가 어떤 경위로 가져왔는지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전시의 주관사인 <요미우리신문>은 유리배가 의자왕이 일본 왕실에 보낸 나무 바둑판처럼 백제 왕실의 조공품일 것이라는 추측 기사를 쓰기도 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