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지혜

한국미술사 연대표

wowjenny 2011. 3. 8. 02:49

한국미술사 연대표

 

 

1. 고대(古代)

1. 선사시대

우리 조상들은 대체로 요서, 만주,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에 넓게 분포되어 있었다. 우리 나라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부터이며,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를 거치는 사이에 민족의 기틀이 이루어졌다. 그들은 자연물에 영혼이 깃들여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 사상에서 자연숭배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정 동물을 수호신으로 모시는 신앙을 바탕으로 예술 활동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특히 토기는 표면에 색채를 발라서 갈거나, 점·선·원과 같은 단순한 기하학적무늬를 압각(押刻)하였다. 기교적으로는 세련된 형태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2. 신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부터 농경생활이 시작되었다. 농경 도구나 토기의 제작이외에 원시적인 수공업 생산도 이루어졌다. 신석기 시대의 미술품으로는 우선 '빗살무늬토기'를 들

수 있다. 약간 배가 부른 V자 모양의 토기 표면에 평행으로 사선을 그어서 장식을 하였는데, 선의 방향을 줄에 따라서 엇갈리게 하기도 하였다. 가지런한 선은 서로 대칭을 이루고 통일된 조화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토기의 무늬는 단순히 미적인 것이 아니라 주술적 의미가 강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 이 시대의 미술품은 주로 흙으로 빚어 구운 얼굴 모습이나동물의 모양을 새긴 조각품, 조개 껍데기 가면, 조가비로 만든치레걸이, 짐승의 뼈나 이빨로 만든 장신구 등이 있었다.



3. 철기 시대

청동기를 사용하고 농사가 발달하면서 평등했던 부족사회는 무너지고, 사유 재산이 축적되고 계급이 발생하면서 예술이 함께 발전하였다.

이 시기의 예술은 종교 및 정치적 요구와 밀착되어 있었다. 그것은 당시 제사장이나 군장들이 사용하였던 칼, 거울, 방패등의 청동제품이나 토제품, 바위 그림등에 반영되어 있다. 또 지배층의 무덤인 돌널무덤등에서 출토된 청동제 의기들은 말이나 호랑이, 사슴, 사람 손 모양등을 사실적으로 조각하거나 기하학 무늬를 정교하게 새겨 놓았다. 이들은 주술적 의미를 가진것으로, 어떤 의식을 행하는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흙으로 빚은 짐승이나 사람 모양의 토우(土偶) 역시 장식으로서의 용도 외에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바위면을 쪼아새긴 바위 그림은 당시 사람들의 활기에 찬 생활상을 보여주고있다.

이 시대 미술품으로 학계의 주목을 끌고 있는 것은 암각화(岩刻畵)이다. 울산의 반구대 바위 그림에는 거북, 사슴,호랑이, 새 등의 동물과 작살이 꽂힌 고래, 그물에 걸린 동물, 우리안의 동물 등 여러 가지 그림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사냥과 물고기잡이의 성공과 풍성한 수확을 비는 염원의 표현으로 보인다.


2. 삼국시대 (三國時代)

삼국시대에는 또한 유교, 불교, 도교의 삼교가 전래되어 우리나라의 미술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특히 불교와 도교가 이 시대미술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불교의 발전과 함께 사상적 내용이 풍부해지고 기술이 고도화됨에 따라 높은 미의 감각을 엿볼 수있는 작품들이 많았다.



1. 고구려 시대

고구려는 19대 광개토대왕 시대에 만주 통구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강력한 국가를 형성하였다. 광대한 지리적 풍토와 외세의 영향을 받아 길러진 늠름하고도 분방하며 용맹스러운 고구려인의 기상은 그대로 미술에 반영되어 어느 나라의 미술보다도 힘과 정열이 넘쳤다.

고구려의 고분에는 돌무지 무덤과 굴식 돌방 무덤이 있다. 초기에는 주로 돌무지 무덤이 만들어졌으나 점차 굴식 돌방 무덤이주류를 이루었다. 돌무지 무덤으로는 장군총이 유명한데, 계단식으로 화강암을7층으로 쌓아올렸다. 굴식 돌방 무덤 내부에는 벽화가 있기도 하여 당시의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굴식 돌방 무덤은흙으로 덮은 봉토 내부에 굴식 돌방이 있는 것으로 쌍영총, 무용총,강서 고분등이 유명하다. 여기에는 풍속도, 수렵도, 무용도,사신도등이 그려져 있어 고구려인의 강건하고 남성적인 기질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무용총의 수렵도는 이러한 사실을 잘 입증해 준다.

그림의 주제는 주로 영생사상을 반영해 주는 죽은 사람의 생활기록이 가장 많다. 선이 굵고 강직하며 주제를 상징적이고 박력있게 다루어 대담하고 웅혼한 고구려인의 대륙적 기상을보여준다.

고구려 미술의 특색은 회화 못지않게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 (延嘉七年銘金銅如來立像)을 비롯하여 불상들의 나부끼는 옷자락이나 화염문등에도 잘 나타나 있다.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 (延嘉七年銘金銅如來立像)은 두꺼운 법의를 입어 몸이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신비하면서도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다. 공예는 통구와 평양 지방에서 나온 기와와 벽돌에 새겨진 장식 무늬에서 힘찬 고구려인의 기상과 솜씨를 알 수 있다.



2. 백제 시대

백제는 부여족의 일파가 한반도의 서남부로 이동하여 옛 삼한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백제의 미술은 북방적인 성격을 가진 원래의 전통에 중국과의 해상교통이 발달되어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고구려의 영향에서 벗어나 높은 문화 수준을 유지하였다. 불교미술과 중국의 남조 문화를 흡수하여 온화하고 우아하며 향토적인 색채의 아름다운 미술을 발전시켰다. 백제의 미술은 매우 부드럽고 모나지 않으며 인간미가 넘치고 세련되었다. 이러한 특색은 5세기부터 7세기 중엽까지의 고분벽화,불상, 와당을 비롯한 공예품, 탑등의 미술 전반에 걸쳐 볼 수 있다.

백제의 회화는 능산리고분(陵山理古墳)의 비운문(飛雲文)과연화문(蓮華文)에서 볼 수 있듯이 부드럽고 완만한 움직임의느낌을 자아낸다. 백제의 회화는 6세기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회화에 영향을미친다.

이렇게 부드럽고 인간미가 넘치는 백제 미술의 특징은 불상에서도 드러난다. 서산 마애삼존불은 양식적인 면에서 외래의 영향을 받았지만, 이들의 얼굴은 복스럽고 밝은 웃음으로 가득차 있어 '백제의 미소'라 불리운다. 부여 군수리 절터에서 발견된 금동보살입상(金銅菩薩立像)과 말기의 대표작 금동관세음보살상(金銅觀世音菩薩像)은 그 기법이 고졸(古拙)하며 백제의 온화함에 중국 남북조의 영향이 가미되어 있다.

공주 송산리의 무령왕릉은 무령왕에 대한 기록인 지석과 함께 금제관식, 무기, 그릇, 구리 거울 등 많은 껴묻거리가 발견되어 당시의발전된 공예 미술을 보여준다. 최근에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된 백제 금동 대향로도 도교와 불교의 색채가 강하게 드러난 훌륭한 공예품이다.

건축에 있어서는 오늘날 전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백제의 공장들이 신라의 황룡사 9층탑과 일본의 법륭사, 사천왕사, 법륜사등을 건축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들 건축에서 백제시대 절의 건축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석탑으로는 목조탑의 건축 양식을 모방한 초기 양식의 익산미륵사지 석탑과, 균형이 잡힌 아름다움을 잘 나타내고 있는 부여정림사지 5층 석탑이 있다. 미륵사지 탑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석탑으로서 9층이며, 우리나라 탑 건축의 원류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3. 신라 시대

한반도의 남동부를 차지한 신라는 비교적 평화롭고 안정된 지역적조건 밑에서 독자적인 미술문화를 이루었다. 신라의 미술은 조화있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신라의 미술은 중국의 남조 문화와 고구려, 백제등과 접촉하면서 화려하고 다양한 문화를 이룩하였다. 특히 5세기 후반에 전래된 불교의 영향으로 더욱 화려하고 독특한종교문화를 이룩하였으며 고분의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들에서 당시의 뛰어난 공예 예술을 엿볼 수 있다. 신라의 미술은 전체적으로 보면 이웃했던 고구려나 백제의 미술과는 달리 엄격하고 추상적이며 사변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신라의 회화는 경주의 천마총과 황남대총이 발굴되기까지는 거의아무것도 알려져 있지 않다. 이 고분들에서 출토된 천마도(天馬圖),기마인물도(騎馬人物圖), 서조도(瑞鳥圖), 우마도(牛馬圖)등을통해서 우리는 신라 회화의 뛰어남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그림들은 모두 화원의 작품이기보다는 공장에 의한 공예화였다.

불교 미술은 삼국 중에서 신라가 가장 늦게 시작하였으나, 이미6세기 후반에는 특유의 전통을 확립하였다. 7세기에 들어서면서 신라의 불상은 삼화령미륵삼존석불(三化嶺彌勒三尊石佛)이나 황룡사지 출토의금동보살두(金銅菩薩頭)에서 처럼 밝은 표정을 보이지만 몸의비례나 옷의 처리등에는 여전히 추상성이 감돌고 있다.

신라 미술의 일반적인 경향은 대개가 매우 정교하고 호화로우며 또 간혹 현대적인 감각을 풍겨주기도 한다. 금속 공예나 유리 공예와는 대조적으로 토기는 다소 조방하고 거칠며 문양은 기하학적이거나 추상적이다. 그러나 기마 인물형 토기에서 볼 수 있듯이 조형성이 뛰어난 특성도 보여준다. 이 밖에도 삼국시대에는 가야도 높은 수준의 미술을 발전시켰음이 금속공예나 이형토기(異形土器)등을 통해 확인된다. 고령지산동에서 출토된 금관이나 기마인물형토기 등을 예로 봐도 이를확인할 수 있다.


4. 통일신라시대의 미술

(1)통일신라

①고유의 전통 문화에 당나라의 문화를 흡수, 소화하여 우리 나라 미술사상 황금기를 이룩하였다.

②불교는 신라의 호국 사상과 일치되어, 불교 중심의 미술이 발달하였다.

③섬세하고 화려하며, 독자적인 정교한 양식을 확립했다.

④사찰과 석탑 등 불교와 관련된 조형품이 많이 제작되었으며, 특히 불국사와 석굴암은 조형상의 구성미가 뛰어난 걸작이다.

⑤금관이나 장신구 등의 정교한 금속 공예와 함께, 상원사와 봉덕사의 범종들은 조형미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다.



(2)조각

①석굴암 본존상: 석굴암 중앙에 안치되어 있는 본존상은 높이가 3m이고, 우리 나라 석조 불상 중 으뜸가는 것으로 세계의 자랑거리이다. 이 본존상을 중심으로 주위의 돌 벽에는 석가모니의 10대 제자와 보살, 11관음 등을 부조로 조각하여 배열하였다. 전실(前室)에는 금강역사상과 천왕(天王)이 역시 부조로 힘차게 표현되어 있다. 그 솜씨는 극히 우아하고 날카로우며, 알맞은 양감과 부드러운 질감이 조화된 신라 문화의 대표적인 미술품이다. 석굴암은 중국의 윈강 석굴의 영향을 받아서 화강암으로 축조되었다.

②금동 약사여래 입상(金銅藥師如來立像): 성덕왕 5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순금 여래 좌상과 더불어 금속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다.

③아미타 여래 입상: 경주 갑산사에 있으며, 높이는 1.8m이다.



(3)건축

①불국사: 경덕왕 10년에 김대성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목조 건물은 임진왜란 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와 함께 돌로 만든 것만 볼 수 있어 옛 모습을 찾을 수는 없으나, 다보탑과 석가탑, 여러 가람들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어, 안정되고 세련된 통일 신라의 미술 역량을 잘 나타내고 있다.

②석굴암: 불국사와 함께 건립된 인공 석굴로, 석가여래좌상, 관음보살상, 나한상, 인왕상 등이 있다.

③다보탑: 곡선과 직선을 잘 조화시켜 구성했으며, 화려한 변화와 안정성이 있는, 통일 신라의 대표적인 석탑이다.

④석가탑: 다보탑의 부드러운 곡선미에 대조를 이룬 직선적인 탑으로, 단순하고 힘차며 안정성이 있는, 통일 신라의 대표적인 석탑이다. 2층 기단 위에 세워진 3층 석탑인데, 사리탑으로 일명 "무영탑"이라고도 한다.

⑤그밖에 화엄사 사리탑, 감은사 3층 석탑 등이 있다.







3. 발해시대 (渤海時代)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으로 이루어졌던 발해에서도 회화, 조각,공예, 건축등 다방면의 미술이 발전했다. 발해 시대의 지상 건물은 남아 있지 않지만, 유적의 발굴로 그웅장함이 확인된다.

발해의 자기는 대체로 무게가 가볍고 광택이 있는데, 그 종류나크기, 형태, 색깔등이 매우 다양하다. 특히 발해의 자기는 같은 시대 여러 나라의 도자기 공예보다 독특하게 발전되었으며, 당에 수출하기도 했다. 발해의 미술은 대체로 고구려 미술의 전통을 계승하고 당나라문화의 영향을 수용하여 그 나름의 미술을 발전시켰다고 볼 수있으나, 그에 대한 구체적인 규명은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져 있다.







4. 고려시대 (渤海時代)



신라의 미술을 계승한 고려의 미술은 불교미술의 발달과 송나라미술의 영향으로 섬세하고 정교한 귀족적인 미술문화를 남겼다. 이 시기에도 여전히 불교가 융성하였고 이에 따라 각 방면의 불교미술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거란·여진·몽고등 북방 민족들의 잇단 침략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문화의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고려가 북송(北宋), 남송(南宋), 원(元), 명(明)등 중국의왕조들과 문화적 교류를 빈번히 하면서 미술 양식을 수용하여 자체의 미술을 발전시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고려시대의 모든 미술이 시종 완벽을 지향했던 것으로 단언하기는 어려울 지 모르나 이 시대 미술의 주된 경향은 역시 귀족적 문화를구현하는데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려 시대에는 도자기, 칠기, 금속등의 공예가 발달하였고, 특히 상감청자의 독특한 기법은 세계적인 가치를 지니며, 회화 역시 다양한 기법과 양식의 불화가 제작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삼국시대, 통일신라 시대와 비교하여 같은 미술계통에서도 분야에 따라 두드러진 차이가 나타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불교 미술에서도 불교 회화와 공예는 호화롭고 정교하여 아취가 넘치는 경향으로 발전되었지만, 불상이나 불탑은 소수의예를 제외하면 다소 균형이 깨지고 경직된 경향을 띠게 되었다.

포괄적으로 말해서 고려시대의 불상이나 불탑등은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에 비해 수준이 현저하게 저하되었다. 또한 중앙과 지방과의 차이가 두드러졌다.



회화

회화는 공민왕 무덤의 벽화와 수락암동 옛 무덤의 사신도, 부석사조사당의 천왕상과 보살, 수덕사 벽화등이 전해진다. 그 밖에 공민왕이 그린것으로 전해지는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가 있는데, 말을 탄 인물과 마른 나무, 풀 등 극도의 사실적인 필치는 웅대하고 품위있는 현세감을 느끼게 한다.

고려시대의 미술 중에서도 회화의 경우에는 인물과 산수는 물론묵죽을 비롯한 문인화 계통의 그림등이 귀족, 화원(畵圓),선승(禪僧)등에 의해 다양하게 제작되었다.

송나라 휘종의 찬사를 받았던 이령(李寧)의 「예성강도」와「천수사남문도(天壽寺南門圖)」를 위시하여 이제현의 「기마강상도」, 필자 미상의「금강산도」 「진양산수도」「송도팔경도」등이 문헌에 전해지고 있는 것은 이미 고려 전기에 한국적인 실경산수화가 발전하기 시작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현재 이 시대 회화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우수한 일반회화작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지금 전해지는 작품으로서 고려시대 회화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것은 불교 회화이다. 이 작품들 중에서도 1286년 제작된 「아미타여래입상」, 동경 천초사 소장의 「양류관음상」, 서구방이 1323년에 그린 「수월관음보살도」등은 고려시대 불교회화의 높은 수준과 독특한 성격을 특히 잘 보여준다. 이러한 그림들은 한결같이 금빛과 채색이 찬란하고 의습과 문양이 정교하며 자태가 단아하여 고려적인 특색을 짙게 풍긴다. 고려시대의 전기에는 호국불교가 성행했던 데에 반하여 후기에는 내세의 구원과 행복을 비는 구복신앙과 관련이 깊은 아미타여래, 관세음보살,지장보살등이 널리 신봉되고 또 자주 그려지곤 했다.



도기와 공예

중국에서도 높이 평가되어 그곳에 다량으로 전해지기까지 했던 고려의 불교회화와 함께 이 시대 미술의 경향과 특색을 직접적이고도 강렬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은 역시 순청자(巡靑磁),상감청자(象嵌靑磁), 회청자(繪靑磁)등의 자기이다.

대체로 고려 초기에는 비색이 가장 아름답고 조형감각이 특히 뛰어난 이른바 순청자(純靑磁)가, 중기에는 세계 초유의 상감청자(象嵌靑磁)가, 그리고 후기에는 이밖에 철사(鐵砂) 등으로 그림을 그려 장식하는 회청자(繪靑磁)가 초·중기에 이어 더욱 유행하였다.



건축과 조각

조소는 불교 조각으로 대표되지만 이미 조형의 이상미는 사라졌다.

선종불교에 의한 부처 모시기의 경시, 불상 수요의 감소가 그원인이 되어 이 시대에 와서 불상 조각은 퇴조하였다. 관촉사 미륵불(일명, 은진미륵)과 우리 나라 유일한 소조 작품인부석사의 아미타여래좌상 등이 있다.

건축은 사원을 중심으로 한 불교 건축이 신라시대의 질서정연한비례 감각을 잃고, 잡다하고 뒤섞인 집과 궁전 건립으로 기법이나 외관이 치졸해진다.

대표적인 목조 건물은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조사당, 수덕사의 대웅전, 성불사의 극락전등이 있다. 그 중 부석사 무량수전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다.





5. 조선시대 (朝鮮時代)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불교를 삼았던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와는 달리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숭상하여 그 전까지의 문화와는 현격한 차이를 드러냈다. 즉, 이 시대를 시종일관 지배했던 억불숭유정책은 당시의 문화를 검소하고 실용적이며 소박한 성격의 것으로 발전하게 했다.

이 점은 미술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교를 숭상한 조선은 불교적이고 귀족적인 성격을 탈피하였다. 사찰 중심의 건축 미술은 궁궐 중심으로, 불교 중심의 회화는 남종화풍의 담담한 화풍으로 변모되었다. 초기에는 안견, 강희안, 이상좌등이, 후기에는 정선, 심사정등의 화가가 전통 회화의 발전에 기여했다. 18세기 이후에는 서민생활을 다룬 풍속화와 민화가 많이 그려졌다.

서민적이고 순박한 조선 미술의 특징은 도자공예, 목죽공예,칠기공예등의 생활용품의 발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조선왕조 시대의 미술은 대체로 고려시대의 귀족적인 정서와는 달리 민족적인 정취를 추구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조선시대의 미술 중에서도 특히 발달했던 것은 회화와 도자 공예및 목칠 공예, 그리고 목조 건축 등이다.



조선시대 회화

이 시대의 미술 중에서도 회화는 우리 나라 미술사상 가장 크게 발전하였다.

건국 초부터 도화원(圖畵圓)이 설치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회화 미술이 꽃피게 되었다. 사대부와 화원들이 이 시대 회화의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하였다. 또한 대나무, 산수, 인물, 화초 등 다양한 소재들이 다루어졌으나감상을 위한 산수가 대종을 이루었다. 그 중에서도 초상화는 동양의 삼국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으로 발달하였다.

인물의 정확한 묘사와 미묘한 정신 세계의 표출은 괄목할 만하다.

조선 시대의 회화는 화풍의 변천에 따라 초기(1392∼약 1550), 중기(약1550∼약 1700), 후기(약 1700∼약 1850), 말기(약 1850∼1910)로나누어지는데 각 시대마다 각기 다른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초기에는 고려시대 회화 및 그 시대에 전래되어 축적되었던 중국 역대의 화풍과 새로이 명으로부터 수용한 화풍등을 토대로, 중국이나 일본의 회화와는 다른 양식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화풍상의 특징은 이 시대작품들의 구도, 공간 개념, 필묵법, 준법등에서 뚜렷이 찾아볼 수 있다. 조선 초기에는 세종조의 안견(安堅), 사대부화가 강희안(姜希顔), 그리고 세종대왕의 아들로 당대 최고의 서예가이며 최대의 중국화 소장자이자 안견의 후원자였던 안평대군등이 활동하며 서화의 발전에 크게기여하였다. 이 시기의 그림 중에서도 특히 안견과 그의 추종자들의 작품들에 한국적인특색이 진하게 배여 있다.

안평대군이 꿈속에 도원을 여행하고 꿈에 본 바를 안견에 명하여 그리게 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1447년 4월에 제작한 것으로 조선시대 최대의 걸작이다.



조선 초기에는 안견뿐만 아니라 사대부 화가로서 명대 절파화풍을 수용하여 대성한 강희안, 인물화의 최대 거장이었던 최경, 노예의 신분이었지만 타고난 그림 재주 때문에 화원이 되었던 이상좌, 여성으로서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여성적인 「초충도(草蟲圖)」를 비롯하여 다방면의 그림을 그렸던 신사임당, 왕손으로서 천진난만한 강아지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렸던 이암,「달마도(達磨圖)」를 그린 김명국 등이 관심을 끈다.



조선 중기의 회화 역시 임진왜란, 병자호란등의 대란과 격렬한 당쟁이 계속되던 정치적 불안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화풍을 이룩하였다. 한편으로는 안견파 화풍, 절파화풍등 조선 초기 이래의 전통을 나름대로 계승, 발전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영모나 화조화(花鳥畵), 묵죽(墨竹), 묵매(墨梅),묵포도(墨葡萄)등에서 종래에 보기 드물었던 새로운 한국적 특징을발전시켰다.

김제의「동자견려도(童子牽驢圖)」,김명국의「설중귀로도(雪中歸路圖)」,이 정의 「묵죽도(墨竹圖)」등은 이 시대 회화의 양상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한국적 화풍이 더욱 뚜렷한 양상을 보이게 된 것은 조선 후기이다.

영조와 정조의 재위 연간을 전후하여 꽃피웠던 조선 후기의 회화는 정선에 의해 발전된 진경산수(眞景山水), 김홍도와 신윤복을 중심으로 유행된 풍속화에서 특히 한국적인 특색을 농도 짙게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이시기에는 남종 문인 화풍이 크게 유행하였고 또 청나라를 통해 서양화법이전래되는 등 전과는 다른 경향들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밖에 이 시대에는서민들 사이에서 민화가 크게 풍미하였다.

정선의 진경산수는 「금강전도」나「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등에서 보듯이 실제로 우리나라에 있는 산천을 새로운 화풍으로 구사하여 그린 것으로 후대의 화원과 민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정선의 제자였던 심사정은 대담한 필선과 고아한 담채를 혼합한 우수한 기법의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이러한 정선파의 산수화들은 종전의 산수화와는 현저하게 다르며 또한 우리의 국토에 실재하는 산천을 묘사한 것이기에 특히 우리의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서민들의 생활의 전경을 주로 해학적으로 묘사한 김홍도와 김득신의 풍속화, 또 이와는 대조적으로 주로 한량과 기녀등 남녀간의 로맨스를 예리하게 파헤친 신윤복은 「미인도」등으로 풍속화에 더욱 한국적인 멋과 특색이 넘쳐 흐른다.

이처럼 한국적인 화풍이 크게 발달하였던 조선 후기를 거쳐 말기에 이르면, 추사 김정희와 그를 추종하던 화가들에 의해 남종문인화가 확고히 뿌리를 내리게 되고후기의 토속적인 진경산수나 풍속화는 급격히 쇠퇴하게된다.

또한 이 시기에는 김정희의 제자로서 호남화단의 기초를다진 소치 허련과 함께 오원 장승업이 배출되어 개성이 강한 화풍을 형성하고 제자들인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 등을 통해 현대 화단으로까지 그 전통을 계승하게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화풍이 중국적 성향을 강하게 띤 점은 아쉽게 생각된다.



조선시대 도기와 공예

조선 시대의 미술에서 회화와 더불어 한국적인 특색을 두드러지게보여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도자기이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 시대의 청자에서 변천된 분청사기와 희고 고운백자가 크게 발전하였다. 이들 분청 사기는 고려시대의 청자와는 달리 서민적이고 즉흥적이며 소박한 특징을지니고 있다. 말하자면 조선왕조적인 특성이 담뿍 함축되어 있다고하겠다. 이러한 분청사기는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자취를 감추게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세종조를 전후한 초기의 백자는 한결같이 균형이 잡히고 때깔이 곱고 단아하며 초기에는 어기로만사용되었으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차차 널리 사용하게 되었다.

조선 시대 미술의 특색은 이 밖에도 목리(木理)를 최대한 살리고 장식을 가능한 한 피하며 뛰어난 비례미를 보이는 목조가구나 자연과의 조화를 이룬 건축 및 자연경관을 돋보이게 하고 인위적인 요소를 최소한으로 제한한 정원등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목죽 공예는 서민생활에 스며든 여러 가지 단순하고 소박한 가구들에서 그 독특한 양식을 자아내고 있다. 이들 목공예품에는 장롱·궤·경대·소반·문갑·탁자·등에 십장생도(十長生圖)나 박쥐무늬, 수복(壽福) 무늬등을 넣었다. 아름다운 목리를 교묘히 이용하여 순박한 의장과 건실한 구조로서구수하고 진실함이 잘 나타나 있다.



조선시대 건축

건축으로는 궁정 건축을 비롯한 성곽·문묘·서원·사원·객사등등 많은 건물이 세워졌다. 그러나 대부분이 임진, 병자의 양란 때 타서 없어지고 지금 남아있는 것은 대개 조선 후기의 건물이다. 조선 시대 건축은 고려시대 건축에 비하여 대개 장식이 번잡해지고 구조가 육중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지붕선의 아름다움, 창살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디자인의 발전은 조선시대 건축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초기의 대표적인 건물로는 남대문과 개성의 동대문이 있고, 후기를대표하는 것으로는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비원의 연경당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