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락동(可樂洞)
- 가락동의 유래는 확실치 않으나, 원래 가락골이 있은데서 붙여진 이름이라 추정된다. 또 일설에는 조선시대에 가락골을 중심으로 5, 6채씩 띄엄띄엄 마을이 있어 자연부락 이름으로 불리어 오다가 을축년(1925년) 대홍수때 한강이 범람하여 송파동 일대가 침수되자, 그 곳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가히 살만한 땅] 즉 좋은 땅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
1914년 3월 1일 경기도 구역확정에 따라 홍이.넘어말.새터말.방죽말.방죽안말.솔모랭이등 자연부락을 합하여 광주군 중대면에 소속시켜 가락리라 하였다.- 가락동의 자연부락
- 기와집마을 : 산 62번지 일대로 2호가 있었는데 일제때 문화재 보호에 힘을 기울인 전형필(全鎣弼)이 조부의 묘를 쓰고, 그 묘를 살피기 위해 기와집을 지은데서 붙여진 이름
- 새터말 : 새로 터를 잡아 집을 지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 넘어마을 : 가락골 너머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외촌(外村)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방아골 : 옛날 물레방아가 있었던 마을로 산 70번지 일대로서 옛날 한 노파가 이곳에 살다가 어떻게 잘못되어 죽었는데 이 노파의 원혼이 밤만 되면 나타나 마을사람을 괴롭혔기 때문에 몇 해 가지못해 이곳에 살던 주민들이 모두 떠나 폐동이 되었다고 한다.
- 흥이마을 : 가락동 40번지 일대로서 옛부터 전해오던 이름
- 거여동(巨餘洞)
- 거여동의 동명은 거암(巨岩)이란 사람이 살았으므로 거암리라 하던 것이 변하여 [김 리], [겜리]라 하였다. 그후 잔버드리, 개롱리, 뒷말을 병합하여 거여리라 하다가 1963년 1월 1일 서울시에 편입되어 거여동이 되었다.
- 마천동(馬川洞)
- 마천동의 동명은 이 지역에 있는 마산(馬山)의 이름을 따서 마천리라 하였던데서 비롯된다. 또 하나는 노인들 사이에 전해오는 조선조 임경업 장군이 백마를 얻어타고 마산을 지나다가 백마물이란 곳에서 물을 먹었는데 이 곳은 아무리 가뭄이 와도 물이 계속 나온다고 하여 마천동이라 하였다 한다.
- 문정동(文井洞)
- 문정동 동명 유래는 병자호란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 가다가 이곳에서 쉬면서 물을 마셨는데, 그 물맛이 매우 좋아 이 마을에 많이 사는 문씨(文氏)성을 따서 문정이라 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일설에는 이 마을 지형이 연꽃처럼 생겼다하여 연화동(蓮花洞)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또한 문정동은 조선시대에는 문씨들이 문중을 형성하고 거주한 곳으로 주로 문씨가 많이 살던 제집마을(기와집 마을)과 김씨.이씨가 많이 살던 큰마을로 이루어져 있었다. 문정동(文井洞)의 옛지역을 보면- 두댐이마을 : 옛날 임경업 장군이 태어났다는 마을
- 헤경마을 : 약 백년전에 석씨(昔氏)라는 노인이 길가에 집을 짓고 낮이면 잡화를 팔고, 밤이면 비워두었다하여 [헛가게 머리]로 불리던 것이 차차 집이 들어서자 이말이 와전되어 헤경머리로 되었다.
- 방이동(芳荑洞)
- 조선조 12대 인조대왕 14년(1636년) 병자호란 당시 대왕께서는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가셨고, 청나라 군인들은 이 마을을 거쳐 남한산성으로 진격해 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 마을은 남.서.북이 산으로 둘러 쌓이고 삼태기안 같이 아늑하고 평화로운 마을이였으며, 마을을 지키는 병장(방이군)들이 있었다. 그래서 산을 기여 올라오는 청병들을 산위에서 활을 쏘고 돌을 마구 던져서 청나라 병장들이 못 올라오게 막어서 결국 다른 곳으로 돌아서 남한산성으로 갔다고 한다.
결국 마을의 자체 방이군들이 오랑캐 침범을 막았다. 물론 마을에 피해는 전혀없이 오랑캐들의 침범을 피한것이다. 그래서 그후부터 오랑캐를 막았다고하여 막을 방(防) 오랑캐 이(夷) 자를 써서 방이골 이라고 불리어졌다.
그러다가 1914년경 마을 서당에 한학을 공부하신 학자분들이 모여서 마을 이름이 글자의 뜻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의논끝에 고쳐진것이 막을 방(防) 자는 꽃다울 방(芳), 오랑캐 이(夷) 자는 흰비름 이(荑)로 고쳐서 방이골이 되었다.
그 후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방이리가 되었으며, 1963년 1월 1일 자로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성동구 방이동이 되었다.
- 삼전동(三田洞)
- 삼전동 동명 유래는 이 마을에 유일하게 밭이 셋 있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원래 이곳은 포구로서 서울근교의 5진(津)중의 하나였는데 다른곳에는 조수가 올라왔으나, 이 세 곳에는 물이 밀리지 않아 밭이 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자연부락 이름은 「삼밭게」또는 「三田渡」라 불렸고, 삼(麻)을 심었기 때문에 마전포(麻田浦)라고도 하였으며 또, 벌판에 옛날 장승을 세웠던 곳이라 하여 장승골 또는 장승벌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이 삼전도는 세종 21년에 신설되었는데 한강나루, 노들나루와 함께 경강삼진(京江三津)의 하나로 진부(津夫)10인이 배속되었으며 이후 삼전도(三田渡) 의 기능이 커지면서 삼전도승이 광진의 나루도 관장하였다.
- 석촌동(石村洞)
- 이곳에 돌이 많으므로 돌이 많은 마을 곧 [돌마리]라고 하던 것이 한자음으로 석촌동(石忖洞)이 되었다. 현재도 송파동, 삼전동, 방이동, 가락동 일대의 주민들은 석촌동을 [돌마리]라고 흔히 부른다. 돌이 많은 이유는 병자호란때 조선을 침입한 청군이 이곳에 돌을 옮겨다 진터를 만들었기 때문에 돌이 많게 되었다고 전한
- 진텃벌(陣攄坪) : 현재 석촌동 고분이 있는 일대를 말하며 병자호란때 청군이 남한산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진을 치면서 붙여진 이름이며 남한산성 밑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 송파동(松坡洞)
- 송파동의 동명유래는 세가지로 추정된다.
- 첫째로, 문종 즉위년의 기록을 보면 삼전도보다 연파곤(淵波昆)이 물살이 빠르지 않으니 나루터로 하겠다는 경기관찰사의 요청이 있어, 이때의 연파곤이 [소파곤]으로 변음되었다가 소파리(疎波里)로 된것이 차츰 송파진으로 불리워진 것으로 볼수 있다.
- 둘째로, 옛날 한강변에 있던 이 마을의 언덕을 중심으로 소나무가 빽빽히 들어차 있어, 소나무언덕 즉, 송파(松坡)라고 칭했다고 한다.
- 셋째로, 옛날 이곳에 사는 어부가 매일 한강변에 나가 고기잡이를 했는데 하루는 잔잔한 물위에서 고깃배를 타고 낮잠을 자던 중 이곳의 소나무가 서있었던 언덕 한쪽이 패어 떨어지는 바람에 잠이 깨고난 뒤로 이곳을 송파라고 불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 첫째로, 문종 즉위년의 기록을 보면 삼전도보다 연파곤(淵波昆)이 물살이 빠르지 않으니 나루터로 하겠다는 경기관찰사의 요청이 있어, 이때의 연파곤이 [소파곤]으로 변음되었다가 소파리(疎波里)로 된것이 차츰 송파진으로 불리워진 것으로 볼수 있다.
- 신천동(新川洞)
- 신천동의 동명은 북단에 흐르는 신천(新川)에서 전래된다. 즉, 한강의 작은 줄기가 뚝섬쪽으로 흘러감으로 새내 또는 한자명으로 신천이라 한데서 붙여졌다. 1925년 대홍수로 말미암아 북안의 한지류인 신천이 새로 생김과 동시에 분리되어 섬을 이루었다. 이때 뚝섬과 신천동 사이에 새로 지류가 생겼는데 이를 새내강, 새내를 한자명으로 신천(新川), 신포(新浦)라 불렀다.
- 오금동(梧琴洞
- 오금동명은 이곳에 오동나무가 많았고, 가야금 만드는 사람이 살았기 때문에 전래되었다는 설과 병자호란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가는 길에 이 지역의 백토고개에서 잠시 쉬면서 측근의 신하에게 무릎안쪽의 오금이 아프다고 말하자 그후부터 이곳을 오금골이라 부른데서 오금동 동명이 유래 되었다는 설이 있다.
옛부터 오금동지역에는 많는 자연부락이 있었는데 이들을 보면- 개롱리 : 병자호란때 임경업 장군이 거여동의 투구봉에서 투구를 쓰고, 이곳에서 농을 열어 갑옷을 입고, 마산에서 말이 나와 타고 출전하였다 하여 그 이름이 유래된 마을
- 오금골 : 오금동으로 불리우는 곳으로 백토고개 앞에 있던 마
- 건너말 : 오금골 건너편에 있는 마을
- 눈머리 : 누에머리로 불리는 마을로 뒷산모습이 마치 누에머리와 같으므로 불리워진 마을
- 신금리 : 새로 마을이 생겼으므로 오금리에 새로된 마을이란 뜻을 따서 불리였던 마을
- 아랫말 : 오금골 아래쪽에 있는 마을
- 안골 : 오금골 안쪽에 있는 마을
- 웃말 : 오금골 윗쪽에 있는 마을
- 백토고개 : 오금동사무소 동쪽에 위치, 고개의 흙이 논과 달리 흰 흙이라서 불려짐(이 고개는 깎여져서 평지가 되어 20m와 30m 도로가 지나가는 사거리가 되었으며 주변에 백토공원이 조성됨)
- 잠실동(蠶室洞)
- 잠실동은 조선초에 양잠을 장려하기 위하여 잠실도회(蠶室都會)가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잠실이라 불리어졌다.
원래 잠실, 신천지역은 한강의 범람원으로 발달했던 부리도(浮里島)에 위치했었다는 설과 자양동과 이어진 반도였다는 설이 있다. 잠실섬은 1930년대만 해도 온 섬에 뽕나무가 무성했으며 1945년 이후 채소밭(땅콩, 우엉, 청참외)으로 변했다가 1971년 잠실섬이 하안남쪽에 연육(連陸)되는 물막이 공사로 인해 육지로 변했다.
- 장지동(長旨洞)
- 장지동의 유래는 마을이 길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또는 잔버들이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자연부락의 명칭을 보면- 안마을 : 큰 마을이라고도 하며, 장지동 68번지 일대로 약 60여호가 살았다.
- 뒷마을 : 장지동 104번지
- 주막거리 : 큰 길가에 주막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10여호가 살았다
- 잔버드리 : 버드나무가 많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
- 풍납동(風納洞)
- 풍납동은 이 마을에 바람드리성 즉, 풍납토성(風納土城)이 있으므로 바람드리 또는 풍납리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풍납동의 자연부락 명칭을 살펴보면- 웃바람드리(上風納里) : 천호대로 주변 일대와 극동시티아파트가 있는 일대
- 아랫바람드리(下風納里) : 웃바람드리 아래쪽에 있는 마을
- 자벌말 : 말현재 풍납동 152-154 일대로 벌판에 있던 마을인데서 붙여진 이름, 낮은 산목에 있다하여 흐리목 또는 흘리향(屹里項)이라고 불리었다.
- 송파구청 홈피에서 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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