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흔적따라

창덕궁 ‘어정’ 2기 발견

wowjenny 2011. 2. 16. 19:35
 

 

   창덕궁 ‘어정’ 2기 발견                   2008.12.24

 

 

19세기 궁궐도에 그려진 우물 실체 첫 확인 개가

창덕궁 후원의 부용지(연못) 서북쪽에서 임금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 2기가 발견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3일 “창덕궁 부용지 서북쪽에서 세조(15세기 중엽) 때 만든 것으로 보이는 우물과

 임진왜란 뒤 숙종 때 보수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우물 등 어정() 2기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이번에 발견된 우물은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1826∼1827년)에 묘사된 우물의 위치와 맞아떨어진다.

세조 때의 우물은 화강암을 쌓아 만든 팔각형 모양(지름 164cm, 깊이 175cm)으로

우물 주변에는 화강암을 부채꼴 모양으로 쌓은 시설이 발견됐으며 역시 화강암을 쌓아 만든 후대의 우물은

지름이 85cm, 깊이가 244cm였다.

신희권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은 “세조 때 우물에서 임진왜란 전후 것으로 보이는 백자가 출토돼

16∼17세기에 폐기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서울 창덕궁 후원에서 발견된 우물에서 나온 백자 그릇(가운데)과 기와 조각들. 백자 그릇은 임진왜란 전후의 유물로 추정된다고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밝혔다. 김미옥 기자


조선 임금 쓰시던 550년전 우물 창덕궁서 발견 창덕궁 후원에서 발견된 ‘임금님의 우물’ 두 곳. 이 중 세조(15세기 중엽)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위)은 550여 년이나 된 것이다. 또 다른 우물은 임진왜란 이후 숙종 때 보수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우물을 발굴한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창덕궁을 그린 동궐도에서만 보이던 우물의 실물이 처음 발견된 것”이라고 말했다. 김미옥 기자

 

 

 

 

 

▲ 23일 오전 서울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 후원 부용지에서 국립문화재연구소 관계자들이 조선시대 임금이 사용했던 우물인 ‘어정(御井)’ 2곳을 발굴하고 있다. 임정현기자

서울 창덕궁 후원 부용지 북서쪽 모서리에서 임금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시대 어정(御井) 2곳이 발굴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는 23일 창덕궁 후원 부용지 주변 우물지 발굴현장에서 설명회를 열고 “‘궁궐지(宮闕志·1834~1849년)’ 등의 기록에 나타나는 조선시대 세조가 만든 우물과 임진왜란 등을 겪은 뒤 숙종 때 보수해 사용한 우물 등 어정(御井) 2곳을 발굴했다”고 밝혔다.

두 우물은 세조 때 만든 마니·파려·유리·옥정 등 네 우물과 관련된 기록을 새긴 비를 보호하는 비각인 ‘사정기비각(四井記碑閣)’ 북쪽 지점에서 서로 5m 거리를 두고 확인됐다. 두 우물 모두 잘 다듬은 화강암으로 만든 팔각형의 형태를 갖고 있으며 지층이나 축조방법, 출토유물 등을 통해 볼 때 사용 시기는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조사단은 부용지와 인근한 지표 밑 1.5m 지점에서 발견된 앞선 시기의 우물(지름 1.64m, 깊이 1.75m)은 세조 때 판 네 우물 중 하나로 추정했다. 또 이보다 서쪽 지표 밑 0.1m 지점에서 발견된 늦은 시기의 우물(지름 0.85m, 깊이 2.44m)은 임진왜란 등 여러차례 병화(兵火)를 겪은 뒤 남은 두 우물 중 하나로 숙종 16년(1690) 다시 보수해 사용한 것으로 보았다. 신희권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은 “창덕궁에서도 조선 전·후기의 유구가 잘 보존돼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고 말했다.

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m

 

 

 

 

창덕궁 후원에서 조선시대 어정(御井) 2기 발굴

- 각기 세조 때 만들고 숙종 때 보수한 것으로 추정돼 -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는 창덕궁의「부용지 주변 관람로 정비」공사에 앞선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임금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시대 우물 2기를 발굴하였다고 밝혔다.

우물은 동궐도(東闕圖, 1826~1827년) 상에 표시된 부용지 북서쪽 모서리, 현 사정기비각[四井記碑閣, 세조 때 만든 네 우물(마니, 파려, 유리, 옥정)과 관련된 기록을 새긴 비를 보호하는 비각] 북쪽 지점에서 서로 5m 정도 거리를 두고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확인되었다. 두 우물 모두 잘 다듬은 화강암으로 만든 팔각형의 형태이나 지층, 축조 방법, 출토 유물 등을 통해 볼 때, 사용 시기는 달랐던 것으로 추정된다. 부용지와 인접한 앞선 시기의 우물은 늦은 시기의 우물의 동편에서 그 보다 1.4m 깊은 상태로 발견되었다.

앞선 우물(지름 164cm, 깊이 175cm)은 1매의 화강암을 둥글게 파내어 바닥을 만들고 그 위로 안쪽을 둥글게 다듬은 화강암 석재 6단을 쌓아올려 완성하였다. 우물의 제일 윗부분은 안쪽은 둥글고 바깥쪽은 각 지게 깎은 석재 4매를 이어 붙여서 팔각형의 형태를 띠게끔 하였다. 우물 주변으로는 부채꼴 모양의 화강암(길이 85cm)을 덧대어 둥글게 깔아 사용면을 만들고, 바깥쪽에는 할석(割石, 깬돌)을 4~5단 쌓아 올린 호석(護石, 둘레돌, 보호석) 담장(지름 5.3m)을 원형으로 돌렸다. 그 사이에는 사용면보다 한 단 떨어지는 박석(薄石, 넓고 얇은 돌)이 깔려 있는데, 이는 물을 흘려보내기 위한 배수로로 추정된다. 우물 내부에서는 임란 전후 것으로 보이는 백자 바리(바닥에서 아가리 쪽으로 벌어져 올라가 아가리의 지름이 20cm 이상인 토기) 1점이 출토되었다.

늦은 우물(지름 85cm, 깊이 244cm)은 별다른 바닥 시설 없이 화강암을 7단 쌓아 완성하였다. 우물 주변으로는 역시 박석을 깔아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나, 박석 아래에서 동궐도에 표시된 우물 울타리 격의 나무 판재가 박혀있는 것이 확인되어 동궐도 완성 이후에도 일부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궁궐지(宮闕志, 1834~1849년) 기록1)을 통해 볼 때, 앞선 시기의 우물은 세조 때 판 네 우물 중의 하나로, 그리고 늦은 시기의 우물은 숙종 16년(1690년) 다시 보수한 두 우물 중 하나로 판단된다.

이번 발굴조사를 통하여 창덕궁 내 임금이 사용하던 이른 시기와 늦은 시기의 우물을 동시에 확인함으로써 조선시대 전·후기의 유구가 잘 보존되어 있는 경복궁과 더불어 창덕궁의 궁궐 변천의 역사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1) 세조 때에 종신(宗臣)에게 명하여 터를 잡아 우물을 파게 했는데 그 뒤에 여러 차례 병화(兵火)를 겪어 두 우물만 남았다. 숙종 16년(1690) 경오(庚午)에 그 고적(古跡)을 애석히 여겨 우물 둘만이라도 보수하라 명하고 이어 그 곁에 비를 세웠다. 숙종이 지은 ‘사정기(四井記)’에 이르기를, 우리 세조대왕께서는 … 첫 번째 우물 이름을 마니(摩尼)라 하고 두 번째 우물은 파려(??), 세 번째 유리(琉璃), 네 번째 옥정(玉井)이라 하고 …

<창덕궁 우물지 현장설명회>
- 일 시 : 2008. 12. 23(화) 11:00~
- 장 소 : 창덕궁 후원 부용지 주변 ‘우물지 발굴조사 현장’
- 자문위원 : 정재훈(전통문화학교 교수), 김동욱(경기대학교 교수)
- 주 최 : 국립문화재연구소 고고연구실, 창덕궁관리소

담당자 : 국립문화재연구소 고고연구실 신희권, 이인숙
전화번호 : 02-720-7068

  

조사지 전경
우물지 발굴 전경
앞선시기 우물지 전경
늦은시기 우물지 전경

                                                                                      | 등록일 : 2008.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