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흔적따라

석촌동 고분군 문화해설 시연

wowjenny 2011. 1. 16. 14:10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할 예비문화해설사 김 경숙입니다.

 

지난달 2회에 걸쳐 한성백제시대의 삶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 대한 시연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삶에 대비되는 죽음의 공간으로서 석촌동 고분군에 대해 함께 하기로 하겠습니다.

 

전반적인 석촌동 고분군을 설명하기 전에

왜 이곳이 중요한 지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곳이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당위성을 인정할 수 있는

즉 한성백제의 도성임을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보통 묘제는 거주공간과 밀접한 관계 하에 놓이게 되는데

그것은 무덤 축조에 필요한 노동력의 규모와 연관지어 볼 수 있기때문에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풍납토성을 축조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중앙집권을 이룬 완전한 국가체계가 완성되었다고 할때 

바로 이 풍납토성이 정궁으로,또 몽촌토성이 별궁이면서 군사적인 방어성으로서의 기능을 갖춘

완벽한 도성임을 입증하는 데에는 몇가지 배경이 필요합니다.

크게 세가지로 그 배경을 요약할 수 있는데요,

 

첫째 삼성동 토성에서 시작되어 구산성지 근처에 이르는 한강변의 제방을 들 수 있습니다.

그 제방은 홍수의 범람을 막기위해서 또 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방어용으로

축조되었다고 보여지구요

두번째는 이성산성과 남한산성의 축조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세번째가 이 석촌동을 비롯한 고분군이지요.

 

그러면 쉽게 그림이 그려지지 않겠습니까?

한강변쪽으로는 제방이 이어져 있고 그 안쪽으로 풍납토성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0.7km 거리에 별궁으로서의 몽촌토성이 자리하고 있구요

1.7km 거리에는 석촌동 가락동 방이동의 고분군이 넓게 분포하고 있습니다.

또 그 우측으로 빙 둘러싼 이성, 남한산성이 있다면

완벽한 형태의 고대국가모습이 완성되어졌다고 말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이 고분군에 관심을 갖고 주목을 해야되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이 고분군이 중요한 이유는

강한 왕권을 증명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특히 제3호 고분의 경우 고구려의 수도였던 길림성 집안의

최대 적석총이라고 하는 태왕릉과 그 규모가 거의 비슷할 정도로

동서 50.8m 남북 48.4m의 거대한 적석총입니다,

 

이런 규모의 적석총을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권력있는 자만이 가능했을텐데요

그래서 4C 후반의 근초고왕의 무덤이 아닐까 추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은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는 아쉬움이 있습니다만

시기적으로나 규모면에서 볼때 의심의 여지는 없는듯 합니다.

 

그럼 이제 석촌동 고분군에 대해 전반적인 것을 알아보겠습니다.

석촌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바로 "돌무지" 마을입니다.

1975년에 사적 243호로 지정된 이유도 이곳에 적석총이 있다는 데에 기인합니다.

3,4호고분이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그나마 1990년 12월에 공원으로 복원과 정비가 되었습니다만

1916년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적석총 66기와 토총 23기 도합 89기의 고분들이

대부분 훼손되고 보존되지 못한 부분은 큰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적석총 66기는 475년 한성백제가 멸망할 때 까지 493년간 21대에 걸친 왕들과 왕비

그리고 왕세손들을 염두에 둔다면 거의 확실시 되는 왕족의 무덤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23기의 토총은 왕의 친인척 혹은 귀족들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겠구요.

 

연관지어 1,2호 고분 가까이에 있는 가락동 고분군에 대한 발굴 여부도

가락아파트의 재건축이 시행되는 시점에서는

다시 한 번 재고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야만 석촌 가락 방이의 전반적인 연대기를 비롯한

제대로된 묘터로서의 기능여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곳 석촌동 고분에는 현재 어느정도 복원이 되었다고 하는 2, 3, 4호 고분과

훼손이 심하여 복원되지 못하고 기초 할석만 보여지는 1호고분과

그 옆에있는 내원외방형 터 

그리고 아직 완전한 발굴이 이루어지지않은 고분이 되겠습니다만

방이동 고분과 같은 구조로 추정되는 둥근 형태의 봉분을 가진 5호고분(즙석봉토분)

또 가장 오래된 형태로 몽촌토성에서도 발견되었던

지하에 구덩이를 파고 매장한 후에 흙으로 덮은 단순한 형태의 무덤으로서의 토광묘 2기 이렇게

모두 8기가 현재 사적 공원 안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 중에 가장 주목 받는 제3호 고분에 대해서 정리해 보겠습니다.

적석총은 크게 기단식과 무기단식으로 나뉘어집니다.

무기단식은 말 그대로 강가의 모래바닥에 냇돌을 사각형으로 깐뒤

그 위에 관을 놓고 다시 냇돌을 덮은 단이 없는 간단한 형식입니다.

이것은 주로 북한강변과 남한강변 그리고 임진강 유역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는데요,

강원도 화천군,평창군,춘성군, 춘천의 중도, 그리고 연천군, 파주군 등지에서 볼 수 있으며

무기단식 적석총은 왕족의 무덤이라기 보다는 그 지역 권력가의 무덤일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습니다.

 

반면에 서울지역에서 발견된 적석총은 대부분 기단식입니다.

기단식은 다시 단순기단식과 계단식으로 나누어 볼 수 있고

후자의 경우 3~5C경에 만들어진것으로 추정됩니다.

기단식은 땅을 고른후 그 위에 넙적한 판석 등으로 기단을 마련한 것이 특징으로

1~2C경에 출현한 것으로 보여지구요,

기단식은 말 그대로 할석을 깔고 기단위에 덧널의 구획을 잡고서 돌로 곽벽을 쌓아 올린 뒤

그 벽이 허물어지지않도록 덧널의 둘레에 다시 돌을 쌓아 마치 새로운 단을 만든 것 처럼 해놓고

덧널의 윗부분을 몇겹의 돌로 덮은 형식입니다. 단의 높이는 90cm에서 1m에 이르는데

3호고분의 경우 3단까지 복원을 마쳤으나 실제는 5단 높이 이상이 아니었을까 추정하고 있습니다.

 

더우기 선문대 이형구 박사님께서는 제2호, 3, 4호 적석총 사이에서 출토된

전돌과 기와의 파편을 통해 집안에 있는 장군총 정상부의 묘상건물로 추측되는

향당 건축물이 3호 적석총 정상부에도 있었던게 아닌가 하는

의견을 내놓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좀 더 연구되어져야 할 과제라고 하겠습니다.

 

3호고분은 처음부터 적석총으로만 만들어진 고분이 아닙니다.

그 터가 풍수지리학적으로 정말 좋아서 그런건지 아니면

공간이 없어서 그런건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3단계에 걸쳐 묘가 쓰여진걸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첫 시기로 가장 아랫 부분에서 대형 토광묘 8기가 발견되었는데

한꺼번에 묻혀있는 것으로 보아 순장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 위에 다시 석관묘, 토광묘, 옹관묘가 발견되었고

마지막에야  위에 적석총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여집니다.

고구려가 왕릉을 항상 새로운 부지에 별도로 마련했던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집안, 평양, 연천, 서울로 이어지는 북방계통의 적석총의 묘제 형태는

하나의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적석총은 북방계통에게는 기원전부터 보편적으로 많이 사용되었던 묘제입니다.

요동반도에 분포하는 고조선시기의 돌무지 무덤에서 그 기원을 찾는 견해가 유력하며

그래서인지 대련 지역에서도 다량의 적석총이 발견된 바 있습니다.

기원전 3~2C경부터 압록강과 그 지류인 혼강, 독로강 유역에 밀집되어 있던 것으로

졸본부여의 묘제에서도 그 형태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반면 영산강이나 낙동강에서도 많은 묘터가 발견되고 있습니다만

그 형태나 재질이 백제쪽과는 전혀 다른 것과도 비교할 수 있겠습니다.

 

이상으로 석촌동 적석총 고분군에 대한 전반적인 개요를 알아보았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 한다면

무엇보다 이곳이 중요한 이유는 첫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한성백제 도성임을 입증하는

고고학적 증거 즉 배경이 된다는 것이구요,

둘째, 고분군의 규모를 통하여 강한 왕권을 표방한 한성백제의

고대국가 완성을 증거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 석촌동 고분군에서는 안타깝게도 부장품들이 많이 출토되지 않았습니다.

한성백제인들의 내세관에 연루된 이유인지 아니면 훼손여부에 따른 손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제2호고분에서 연질토기 조각들이 다량 출토된 것과

금으로 만든 세환식 귀고리가 발견된 것등을 제외하면

특별한 것이 없다는 것 또한 무척이나 아쉬운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발굴 가능한 지역에 대한 제도적인 뒷받침을 위해서

여러분들의 무한한 관심과 애정이 그 무엇보다 절실하다는 사실입니다.

한성백제에 대한 사랑 꼭 약속해주시구요!!

 

혹 더 궁금하신 부분이 있으시면

망설이지 마시고 질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추운데 오랜시간 고생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예비문화해설사 김 경숙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