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궁의 다이쿠우시(大宮司·주지격)인 간 마사모토(菅政友)의 손이 떨렸다. 이 신궁은 신무(神武) 천황이 나라를 평정하는 데 사용했다는 신검(神劍)을 모신 곳이었다. 이 신궁에는 이른바 절대 가서는 안된다는 금족지(禁足地)가 있고, 창의 일종인 6차모(六叉●·칠지도)라는 신기한 물건이 있다고 전해져 왔다. 그런데 이 물건은 오랫동안 특수상자 속에 들어 있어 어느 누구도 열면 ‘저주를 받는다’는 몸서리쳐지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간 마사모토가 연 ‘판도라 상자’=그런데 간 마사모토가 그걸 금족지 남서쪽에 있는 ‘신고(神庫·무기보관창고)’에서 찾아내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격이었으니 얼마나 가슴이 떨렸을까.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어본 간 마사모토는 깜짝 놀랐다. 바로 그 ‘6차모’가 확인된 것이었다. 이 신성한 칼은 녹이 심하게 슬었으나 그 녹 사이에 반짝거리는 금빛을 확인하고는 또한번 경악했다.
글자를 예리하게 파낸 뒤 금을 밀어넣어 새긴 이른바 금상감(金象嵌) 기법의 글자들이 보였던 것이다. 계속 닦아내자 나타나기 시작한 글자, 글자들. 앞면에 34자, 뒷면에 27자 총 61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놀랍게도 앞면에는 칠지도(七支刀)가 만들어진 내력과 제작한 연월일이 새겨져 있었다. 이 칠지도는 몸체의 좌·우에 어긋나게 양날을 가진 각 3가닥씩의 가지, 즉 여섯 가지에다 몸통 상부에 마련된 양날까지 모두 7개의 검을 갖추고 있었다.
그 명문은 이랬다. 앞면에 ‘泰□四年□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鋼七支刀□百兵宜供供候王□□□□作’ 등 34자와 뒷면에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등 27자.
간 마사토모의 명문해석을 보자. 그는 ‘泰? 四年(태? 4년)~’으로 시작하는 명문의 제일 첫머리 글자인 ‘태’ 다음 글자의 판독을 ‘始(시)’자로 보아 이를 ‘泰始(태시)’로 판독했다.
그는 이 ‘태시’를 중국 서진(西晋·265~274년)의 연호로 보면서도 진 무제(武帝) 4년인 서기 268년에 맞추지 않고, 일본서기 신공황후(神功皇后) 52년인 서기 252년에 맞추어 해석했다. 그 이유는 ‘신공황후 52년’ 기록에 보이는 내용 가운데 “백제왕이 왜왕에 칠지도(七枝刀)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제왕이 바친 헌상품?=그로부터 10년 뒤인 1883년 중국 지안(輯安)의 고구려 광개토대왕 비문이 발견됐다. 일본학계는 이 두 금석문이 고대 한·일 관계를 밝히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증거라면서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그들이 보기에 이 두 금석문의 명문 해석은 당시 일본이 고대 한반도의 남부지방을 지배하고 식민지로 삼았다는 소위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設)을 뒷받침하는 ‘자지라지는’ 물증이었다.
그후 간 마사모토의 ‘태시 연호’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나왔지만 임나일본부설은 흔들리지 않았다. 1960년대에는 명문 중 ‘태? 4년’은 ‘태시’가 아니라 ‘태화 4년(東晋 연호)’인 서기 369년이며, 일본서기 신공기에 기록된 연대(신공 49년·서기 249년)는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이 나왔다.
즉 이 일본서기 신공기 기록은 ‘2주갑(1주갑은 60년)’ 즉 120년의 연대 차이를 인정하여 연대를 내려야 하고 이에따라 369년의 기록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 원래 일본서기 연대는 120년 정도 깎아내려야 우리나라 삼국의 연대에 부합될 만큼 조작적인 냄새를 피운다는 게 정설이다. 그래서 이 ‘369년 설’이 매우 설득력을 얻었다.
그렇게 따지면 신공 49년은 서기 369년이며 그것은 바로 중국의 태화 4년에 해당되기 때문. 그런데 이 신공 49년의 기록을 보면 “‘야마토 정권’이 신라를 치고, 낙동강 중류 이남의 7국을 평정하여 ‘枕彌多禮(침미다례)’를 백제에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 칠지도는 백제왕이 “백제가 일본 야마토(大和)정권에 영원히 충성을 서약하는 증거로 만들어 바쳤다”는 게 수정된 주장이다.
◇백제의 하사품이 맞다=어쨌든 일본학자들의 일방적인 연구가 계속됐지만 우리 학계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던 1963년 북한의 김석형(金錫亨)이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백제 헌납설’을 정면으로 뒤집는 주장을 발표, 논쟁의 도화선을 댕겼다.
그는 “지금까지 일본학자들이 주장해온 태화라는 연호는 인정하지만 그것이 중국의 연호가 아닌 백제 고유의 연호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이 칠지도는 5세기대 ‘황제’의 위치에 있던 백제왕이 ‘후왕’의 위치에 있던 ‘일본에 있는 소국의 백제왕’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칠지도 논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남한에서는 이병도가 1976년 “역시 태화라는 연호는 백제의 고유의 연호가 분명하고 백제의 왕세자가 하위자인 왜왕에게 내린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한 뒤 그 연대는 서기 372년이라고 주장했다. 오늘날까지 이 칠지도를 두고, 한·일간에 백제가 일본왕에게 바쳤다는 ‘헌상설’과 백제왕이 일본왕에게 내려주었다는 ‘하사설’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이제 결론을 내려보자. 역시 칠지도 명문의 연호인 ‘태?4년’을 백제 고유의 연호로 본다면 일본서기 신공기 기사(즉 신공기 49년과 52년 기사)는 백제 근초고왕 24년(369년)과 27년(372년)에 해당된다. 근초고왕 24년인 서기 369년에는 고구려 2만 대군이 침입했으나 5,000여명을 잡아 죽이고, 급기야 371년에는 고구려 평양성을 쳐서 고국원왕을 죽였다. 그야말로 이때는 백제의 국력이 최전성기였다.
그렇게 강국이던 백제가 일본의 야마토 정권에 칠지도를 만들어 받친다는 것은 망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우에다 쇼죠(上田正昭)가 1971년 주장한 바대로 ‘상위자’인 백제왕이 ‘하위자’인 왜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칠지도는 백제 근초고왕 작품=칠지도는 백제 근초고왕 때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제작연대. 명문 가운데 제작 월일인 ‘6월16일’ 즉 병오(丙午)일에 해당되는 날짜를 역산해 보면 서기 367년이 이에 해당된다. 이 때는 근초고왕 재위 22년이 되는 해.
그런데 366년의 일본서기 신공기의 내용을 보면 “근초고왕이 철제품을 만드는 원료인 철정(鐵鋌)을 왜에 보낸다”는 기록이 있다.
뿐만 아니라 근초고왕때 고흥을 시켜 백제국사를 편찬하게 했으며 한자를 일본에 전한 사실들을 상기하자. 결국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해볼 때 백제는 367년에 칠지도를 만들어 왜에 하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진품을 공개해서 한·일공동으로 심층적인 연구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끊임없이 피어나는 명문조작설을 규명하고, 판독이 어려운 글자를 과학적으로 밝히는 작업이 필요할 때다. 칠지도에 새겨진 명문을 나름으로 해석한다.
“태화 4년(근초고왕의 연호·서기 367년) 6월16일 병오일에 백번 담금질하여 단조한 백련광(百鍊鑛)으로 칠지도를 만드니 어떤 침략병이라도 물리칠 수 있어 후왕에게 줄 만하다. 선세 이래로 이런 칼이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인 기(奇)가 성음으로 왜왕 지(旨)를 위하여 만드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도록 하라”
〈조유전/고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