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흔적따라

조선왕조 오백년을 지켜온 서울(2)

wowjenny 2011. 7. 25. 18:47

 

소설가 淸山 윤영근의 십승지(十勝地)와 가거지(可居地) 50.

조선왕조 오백년을 지켜온 서울(2)

입력시간 : 2011. 07.25. 00:00


천하의 대명당이자 發福의 땅

한강 물길 천혜의 요새 방패 역할

이성계 천도 확정 궁궐 조성 독려

숭례문 도성제일관문 교통요충지

서울은 이중으로 산이 둘러쌓고 있는 곳이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병풍을 치듯 동서남북으로 감싸고 있는 산은 북악산, 인왕산, 목멱산(남산), 낙산이 그것이다. 이는 안쪽에 있는 산이라서 내사산內四山이라고도 부른다. 이와는 반대로 멀리 퍼진 산으로서 외사산은 북한산, 덕양산, 관악산, 용마산을 말하며 내사산을 싸고돌며 흐르는 산줄기가 크게 포옹하며 길게 뻗어 내렸다.

서울은 산뿐만이 아니라 물길도 이중으로 감싸며 흘러서 절대길지로서 승지의 요건을 갖춘 천하의 대 명당으로 발복(發福)의 땅이다. 먼저 한강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굽이치고 휘돌며 흘러가는 물길이 서울의 중심을 흐른다. 한강은 외 명당 천으로 서울을 지켜주는 천혜의 요새처럼 외부의 적을 막아주는 방패와 같다.

곁들여 청계천은 서쪽에서 나와서 동쪽으로 흐르는 서울의 젖줄로 풍수에서 가장 길하다는 서출동류수(西出東流水)이다. 물길이 겹으로 포개지며 흐른다. 살만한 곳으로는 최고의 가거지인 샘이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고구려의 장수왕은 남쪽에 있는 수도라 부르면서 남평양으로 대신했던 곳이 서울이다. 물론 신라 진흥왕 시대에도 한주라 부르며 중요시했고 고려 숙종 때는 남쪽에 있는 서울이라며 남경이라 불렀다. 우왕은 아예 서울천도를 꿈꿨지만 최영의 반대로 중간에 그만둔 사례도 있다. 하륜의 말을 듣던 이성계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제 남은 문제는 궁터를 넓은 서울의 어디로 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태조는 권중화, 정도전, 성석린, 남은, 하륜 등 모든 중신들은 총동원하여 궁터를 잡아보도록 했다. 8월에는 군신들을 거느리고 직접 한강 현지를 두루 살펴보았지만 마음의 결정을 내릴만한 적당한 장소를 찾아내지 못했다. 서울에서 고려 남경이었던 구 궁지를 중심으로 산세를 관망했다.

당대제일의 지사이던 윤신달에게 물어보았다. 나라 안에서 개경을 상지로 하고 이곳을 그다음으로 치지만 서북방이 낮으며 수천이 높고 험악하다고 했다. 태조는 만족해서 왕사 무악자초에게 물었더니 신중한 대답을 했다. 즉 서울은 도읍을 정하기에 적당하나 워낙 큰일이라 여러 사람의 의견을 쫒아서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많은 신하들은 서울천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신도읍지 경영에 착수한 태조는 궁궐의 조성도 동시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태조 3년(1294)에는 신궐조성도감을 두고 청성백 심덕부, 좌복야 김주, 전정당문학 이염, 중추원학사 이직 등을 판사에 임명하여 실무를 담당하게 하고 북악산(北岳山)을 주산으로 삼아 궁궐의 정면이 남남동을 바라보게 터를 잡았다.

태조는 중신들을 서울로 보내 종묘, 사직, 궁궐터와 도로의 기점을 정하도록 했다. 물길도 새로 만들었다. 도읍지의 윤곽이 드러나자 곧이어 실무진을 서울에 보내 공사를 추진했다. 드디어 개경을 떠나 서울로 천도를 단행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조선 오백년의 역사는 서울에서 시작되었다. 1394년 10월 28일은 서울로 입성한 최초의 날이다.

서울천도를 끝낸 태조는 궁궐, 종묘, 사직의 건설을 마치고 수도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하여 성곽을 쌓아야만 했다. 성(城)은 국가의 울타리요 외침을 방어하고 민생을 도모하기 위하여 반드시 있어야한다.

그는 평생을 야전으로 돌며 전쟁에 몰두했던 전략전술가이자 장군으로 나라님을 지켜줄 도성이 있어야 함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정도전에게 서울도성의 기초를 측정하도록 했다. 태조도 자신이 직접 높은 산으로 올라가 궁궐을 내려다보며 서울도성을 쌓을 곳을 관찰하며 축성에 관심을 기울였다.

일등 개국공신 정도전은 산세를 살피며 백악산, 낙산, 목멱산, 인왕산의 소위 내사산을 연결하는 5만9천550척의 서울도성 터를 확정했다. 오늘날로 말하면 약 18km로 사십 오리에 해당되는 길이다.

서울도성의 성터가 내사산의 산등선을 따라 정해졌고 성터를 측정하여 내릴 수도 있는 것이고 또한 눈이 산등선을 따라 먼저 녹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사대문을 포함한 서울도성은 풍수를 모르는 자이거나 군사정략가가 아니더라도 주변 지리적 여건에 따라 최대한으로 쌓아올린 서울도성임에 틀림이 없다.

서울도성에는 4방위에 따라 4개의 대문(숭례문, 돈의문, 숙정문, 흥인지문)과 그 사이에는 4개의 소문(소서문, 창의문, 흥화문, 광희문)까지 모두 8개의 출입문을 세웠다.

총길이 18km에 이르는 서울도성공사에는 무려 12만 명이 동원되어 49일 만에 완공되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공사 진행으로 부상자와 추위에 지치고 동상에 걸린 자들이 속출했다. 그러나 나라의 기초를 다지는 공사인 만큼 날씨 때문에 속도를 늦출 수는 없었다. 모든 난관을 뚫고 서울도성은 우리 선조들의 피와 땀으로 이룩된 건축물이자 대단한 문화유적임에 틀림이 없다.

최근에는 헐리고 땅속으로 파묻혔던 서울도성의 쌓았던 흔적 18km를 찾아내서 세인의 관심을 끈다. 동대문운동장에서는 사라진 서울도성(1396년 건립) 123m가 잔존높이 4.1m로 옛 모습을 드러냈다. 600년 동안 땅속에 묻혀있던 조상들의 숨결이 살아난 것이다.

서울의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서울도성(사적 제10호)은 장안에 있는 4개의 대문과 소문을 서로 이으며 전체의 길이가 모두 18km에 이르렀지만 일제 강점기에 헐리고 파묻히며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서울도성은 북악산 일대에 비교적 잘 남아있지만 서울의 도심에는 종로구 누상동과 삼청동, 중구의 장충동 신라호텔 경내 등 극히 일부지역에만 성벽이 남아 있어서 성곽의 흔적을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숭례문에서 소의문(서소문)까지 이어지는 서울도성의 흔적이 고스란히 발견되었다. 창덕여중의 담장 밑에서도 도성 하부가 나왔다. 돈의문(서대문)과 소의문을 이어주던 성벽은 하부 2단 정도가 학교의 담장으로 살아있었다. 경신고등학교 담장과 서울시장 공관 인근주택가에서도 서울도성의 흔적을 찾아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발굴결과를 보면 서울도성은 서울도심 지하 곳곳과 도로, 주택가, 학교담장에 모습을 숨긴 채 600년의 세월동안 우리 곁을 지켜왔다. 숭례문, 흥인지문, 돈의문, 숙정문사이에 있는 작은 소문 4개를 서로 연결하는 서울도성을 다시 잇고 쌓아야 진정한 서울 얼굴 되찾기의 사업이 될 것으로 믿는다. 서울시에서 추진 중인 서울도성의 정확한 위치와 현황파악을 위한 프로젝트가 조속히 마무리되기를 바란다.

서울도성에 딸린 四대문은 유교사상인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따라 지은 문이다. 그것은 풍수지리사상과 음양오행설이 상호 밀접한 관련을 짓고 있다. 대체로 저녁 10시경이면 모든 도성 문을 닫고 새벽4시가 되면 문을 여는 통행금지가 철저히 지켜졌다. 서울도성과 성문은 수도 방위에 꼭 필요했으며 서울도성안의 치안을 유지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하는데 막중한 역할을 담당했다.

지금은 불타버린 국보1호인 숭례문은 서울의 위치상 경복궁의 남쪽에 자리해서 서울도성제일의 관문이며 교통 상 가장 중요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통상 남대문이라고 불렀던 숭례문은 태조 5년에 서울도성을 쌓을 때 같이 축조되었다. 문을 중수할 때 발견된 상량일자를 묵서한 대들보가 세 개가 나왔다. 세 차례나 크게 고치고 수리했다는 증명이다.

우리의 국력도 커진 만큼 서울도성의 복원문제도 해결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고증에 의한 서울도성의 복원은 시대를 뛰어넘는 사업이자 오늘을 살아가는 후손들이 자존심을 걸고 이루어 내야 한다.

조상들의 지혜와 손때가 묻어있는 서울도성을 사대문과 그 사이의 사소문까지 서로 연결해서 옛 모습을 되찾아 복원한다면 가히 세계적인 명물이 될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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