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1.26 마누샤
백제와 일본왕실의 血緣 실체 규명
백제26대 聖王은 일본 ‘비타쓰왕’의 生父
――우에다 마사아키 박사의 [신찬성씨록] 고증, 기타 고대문헌 고찰
홍윤기 한국외대 교양[일본사회와 문화]담당교수
문학박사/일본센슈대학 국문학과
왕인문화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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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지금까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일본속 백제왕국’의 비장 고대 일본 문헌들을 중심으로 문헌사학으로 고증하면서 그 실체를 규명하련다. 일본 고대 역사학의 태두(泰斗)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토대 사학과 명예교수, 아시아사학회장, 1927~) 박사는 지금부터 31년 전에 일본 최초로 [백제 칠지도(七支刀)]가 백제왕으로부터 백제 식민지였던 “왜의 후왕(侯王)에게 하사되었다”([倭國の世界],1976)고 밝혀 일본 사회에 큰 파문을 던졌다.
그 이후 우에다 박사의 자택(교토부 가메오카시)으로 과자상자를 들고 일본 국수주의 청년들이 밀어닥쳤다. 그들은 “우에다 박사님, 이번에는 과자가 들었지만 다음에는 다른 것이 들게될 것입니다”라는 협박을 받았다고 약 8년전에 우에다 박사는 필자에게 자택에서 말해주었다. “과자 대신에 상자에 다른 것이 들어있을 것”이란 무슨 뜻인가.
또한 최근이다. 저명한 일본 고대사학자 이시와타리 신이치로(石渡信一郞/東京都立千歲高校 敎諭,1926~ ) 씨는 “저는 일본 문부과학성(교육부)으로부터 몹시 미움을 받고 있습니다”(2007.7.24)라고 필자에게 고백했다. 이시와타리 신이치로씨는 저서[구다라(백제)에서 건너 온 오진천황](百濟から渡來した應神天皇/2001)을 저술하여 일본 사학계에서 크게 주목 받고도 있다. 선진국을 자처하는 현대 일본에서 어째서 이렇듯 일본 사학자들은 학문의 자유를 유린당하고 있는 것일까.
우에다 박사는 금년(2007) 봄인 지난 5월14일 자택에서 일본 국보급인 일본 고대 왕족과 귀족 족보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서기815년 일본왕실 편찬)을 필자에게 직접 꺼내서 보여주며 “제30대 비타쓰왕은 백제왕족입니다”라고 우리 일행 앞에서 증언했다. 일본 제30대 비타쓰왕의 생부는 백제 제26대 성왕이며, 비타쓰왕은 백제 제27대 위덕왕의 친동생이다. 백제 제24대 동성왕과 제25대 무령왕은 두 분 모두 일본에서 모국 백제로 귀국하여 백제왕이 되었다(‘일본서기’).
백제 제26대 성왕은 서기544년 신라군과 전투에서 사망한 것이 아니며, 이 당시 장남 창(昌)을 백제 제27대 위덕왕으로 계승시키고 일본 왕실로 건너갔다. 성왕은 이미 그 이전 서기539년부터 일본제29대왕을 겸임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일본왕실에서 서기794년 교토(헤이안경)로 새 왕도를 천도해왔을 때 성왕의 일본왕실 사당(平野神社)을 왕도 북쪽에 웅장하게 세웠으며 현재까지 성왕의 사당(京都市平野宮本町)은 잘 보존되어오고 있다(‘袋草子’ 1158).
필자는 일본 고대역사 고증학자로서 일본 문헌들을 제시하며 이 글을 쓰기로 했다. 아울러 독자 여러분의 고견을 바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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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백제인 ‘오진왕’의 직계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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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곤지왕자→日本에 건너가서 日本의 오진왕이 됨(4C 후반경) ↓
日本 닌토쿠왕(오진왕의 제4왕자)→형제간→日本왕실에 살던 무대왕/우시왕(뒷날의 백제24대 동성왕이 됨)
↓
백제24대 동성왕(日本서 옴)의 왕자→백제25대 무령왕(사마)→친동생/日本의 남제왕/계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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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25대 무령왕(日本서 옴)의 왕자→백제26대 성왕
↓
백제26대 성왕→日本에 건너가서 킨메이왕이 됨(日本王을 겸임한 백제 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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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27대 위덕왕(성왕의 장남)→위덕왕의 친동생(성왕의 차남)이 日本의 비타쓰왕(‘신찬성씨록’이 입증함)
‘백제궁’을 짓고 살았던 비타쓰 왕과 그의 손자왕
지난 5월14일 오전 10시경에 필자 일행은 일본 교토부의 한적한 도시인 가메오카(龜岡) 전원 지대로 우에다 마사아키 박사댁을 심방했다. 이 날 우에다 박사는 조상 대대로 서재에 고이 간직하고 있던 일본에서 두 번 째로 오래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815)을 꺼내다 필자에게 쥐어주며, 그 내용을 이모저모 상세하게 설명했다. [신찬성씨록]은 일본 고대의 왕도(王都)였던 ‘헤이안경’(平安京, 지금의 교토시)의 왕족과 귀족들 1182가문의 신분을 기록하여 입증해주는 중요한 역사 계보서이다. 이 역사서는 백제계 제50대 간무왕(781~806 재위)의 왕명으로 왕실에서 직접 편찬되었다.
우에다 마사아키 박사는 우리 일행들에게 “홍교수는 저와 30년 간이나 한일간에 학문을 교류하고 있습니다”라고 전제하면서 [신찬성씨록]의 첫대목(第一帙)인 즉, 일본 왕도의 최고위 왕족(左京皇別) 항목들중의 가장 핵심이랄 수 있는 왕족 30개 가문들의 이름이 나열되는 대목을 펼쳤다. 그리고는 그 중의 하나인 12번 째의 [대원진인](大原眞人)이라는 왜왕실 왕족 가문의 대목을 손으로 짚었다. [대원진인]이라는 일본 왕족이 누구이냐고 하는데 관해서는 다음처럼 한자어로 그 내용이 또박또박 씌어져 있었다.
[大原眞人. 出自諡敏達孫百濟王也. 續日本紀合.]
(대원진인, 그의 조상은 시호가 바타쓰<민달>이라는 백제 왕족이니라. [속일본기] 기록에도 부합한다).
다시 풀이하자면, “대원진인의 조상은 일본 제30대 비타쓰(민달)왕이며 그는 본래 백제왕족이다”라는 고증이다. 이 귀중한 역사 문서는 [속일본기]라는 왕실 편찬 역사책(서기797년 왕실에서 성립)과도 내용의 사실이 부합된다고 확인마져 하고 있다.
여기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대원진인’이라는 일본 왕족이 된 백제인 출신의 왕족 보다, 그의 친할아버지인 조부 제30대 일본왕인 “비타쓰(민달)왕은 그 출신이 본래 백제 왕족이다”라는 사실(史實)이다. 그러므로 민달왕의 후손인 지금의 일본 왕실도 백제왕족 비타쓰(민달)왕의 후손이며, 동시에 백제인들의 후손이라는 점에 변함이 없다.
우에다 마사아키 박사는 [대원진인](大原眞人) 대목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비타쓰천황은 백제왕족 출신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라고 필자에게 단정해 말했다. 그 말을 듣던 우리 일행은 저마다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은 “비타쓰(민달)천황은 백제왕족”이라는 사실보다, 우에다 마사아키 박사의 학문적 양심에 대한 뜨거워지는 존경심이었다.
‘일본서기’(서기720년 일본왕실 편찬)라는 역사책에 보면 “제30대 비타쓰(민달) 천황(敏達, 572~585 재위)은 나라(奈良) 땅에서 ‘구다라 오이궁’(百濟大井宮, 백제대정궁)을 지었다”는 대목도 나온다. 즉 비타쓰(민달)왕이 나라 땅의 백제인 집단 거주지인 ‘구다라오이’(百濟大井, 백제 대정)이라는 곳에다 왕궁을 지었다는 기사이다. 이것도 왜나라 비타쓰(민달)왕이 백제 왕족 출신이라는 것을 방증한다. 더구나 비타쓰(민달)왕의 친손자인 제34대 조메이(서명)왕(舒明, 629∼641 재위)도 나라땅의 “구다라강(百濟川, 백제천) 옆에다 구다라궁(百濟宮, 백제궁)과 구다라노데라(百濟寺, 백제사)라는 큰 가람을 지었다. 조메이(서명)왕은 구다라궁에서 살다가 서거했을 때는 ‘구다라노 오모가리(百濟大殯, 백제 대빈)’로 장례를 치렀다”(‘일본서기’)고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마유즈미 히로미치(黛弘道)교수는 ‘일본서기’의 조메이(서명)왕 대목인 죠메이기(舒明紀)의 주해(註解)에서, “여기서 말하는 빈소는 그 의식(儀式)을 성대하게 거행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본다”고 지적했다. 더구나 ‘백제대빈’이란 본국인 백제 왕실에서 거행해온 성대한 왕실 장례 의식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백제인들이 정복의 땅 왜나라에서도 ‘백제대빈’을 거행했다는 사실은 그당시 나라(奈良)땅을 지배한 한국인 왕가의 세력이 절대적이었던 것을 추찰케 한다.
이 일본왕들이 백제인이라는 것은 부연할 여지도 없다고 본다. ‘백제 대빈’이란 백제 왕실의 3년상 장례로서, 백제 제25대 무령왕(501∼523년 재위)이 백제 왕도였던 곰나루(웅진, 공주) 지역에서 ‘백제대빈’ 3년상 장례를 치룬 것도 오늘의 충남 공주 무령왕릉에서 1971년 7월8일 출토된 무령왕의 ‘묘지명’에서 입증되고 있다.
일본 고대 사학자인 세이조대학 사학과 사에키 아리키요(佐伯有淸) 교수는 비타쓰왕의 친손자인 “조메이(서명)천황은 생전에 ‘구다라 천황’(百濟天皇, 백제천황)이라고 불리었을 것이다”([新撰姓氏錄硏究], 1970년)라고 연구 발표해서 일본 사학계의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부연할 것도 없이 비타쓰(민달)왕과 그의 친손자 조메이(서명)왕이 생존시에 ‘백제왕’ 소리를 들었음을 사에키 아리키요 교수가 지적하는 것도 양심적인 학구 자세다.
서기572년에 제30대 왜왕으로 등극한 비타쓰(민달)왕이 ‘백제대정궁’을 세운 오이(大井, 대정) 땅은 어느 곳인가. 그 터전은 지금의 나라현의 ‘고료초 구다라’(廣陵町 百濟)라는게 일본 사학계의 통설이다. 이곳에는 현재(2007.11) ‘구다라 우편국’(百濟郵便局, 백제우편국)도 영업중이다. 고료초 구다라(백제)의 땅 명칭은 현하 일본 정부의 ‘백제’라는 행정 지명(行政地名)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두 곳 중 하나이다. 현재 남아있는 또 다른 한곳은 교토시 동쪽의 ‘히가시 오우미시 햐쿠사이지초’(東近江市百濟寺町)다. 우리말로는 ‘백제사정’이다. 일본 최대의 비와코 호수 너머 히가시 오우미시 햐쿠사이지초의 스즈카산(鈴鹿山) 등성이에 지금도 우뚝 서 있는 유서 깊은 백제사 때문에 행정지명조차 ‘백제사정’이다. 이 사찰의 명칭은 ‘샤카산(석가산) 햐쿠사이지’(百濟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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