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4.16 중도일보
“백제역사의 시작과 끝은 부여입니다.”
한국전통문화학교 이도학 교수(문화유적학과)는 “백제가 538년 도읍을 사비성으로 천도한 후 국호를 부여(扶餘)로 고친 것은 왕실의 계통이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이라며 백제사의 출발은 고구려가 아닌 부여로 새롭게 인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5일 국립부여박물관에서 한 ‘백제사 개설’ 강좌에서 이 교수는 “472년 개로왕이 북위(北魏)에 보낸 국서를 보면 ‘저희는 고구려와 함께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습니다’라며 왕실의 계통을 부여로 밝히고 있듯 백제는 국가의 법통을 부여에서 찾았다”며 “이에 따라 오늘날 백제 왕조의 마지막 도읍지 이름을 부여로 일컫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백제의 건국주체와 풍토, 문화, 천하관을 이야기하며 강력한 해상력을 바탕으로 동아시아를 누빈 대국이자 선진국이었던 백제를 과소평가 하지 말아야한다고 강조했다.
“허구인 삼천궁녀 이야기로 의자왕을 매도해선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인 이 교수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장한 사람을 광개토대왕으로 알고 있는데 광개토대왕이 64개의 성을 정복했다면 의자왕은 지금의 경북 구미에까지 이르는 100여 개의 성을 점령한 최고의 정복자”라며 효심과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로 불린 의자왕에 대한 재평가를 촉구했다.
<> 이 교수는 또 칠지도(七支刀)를 백제가 왜(倭)에 진상했다는 일본의 주장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는데 그는 “칠지도 명문에 백제왕이 왜왕에게 준다는 내용과 함께 ‘후세에 전하여 보여라’는 명령조의 글귀로 보아 하사한 것이 확실하며 명문 자체에 백제왕의 권세와 천하관이 드러나 있다”고 일축했다.
익산 미륵사 석탑 사리봉안기 출토로 논란이 되었던 서동설화에 대해 이 교수는 “선화공주를 버리기에는 너무 아깝다”면서 “왕실사찰에서 발견되는 발원문에는 대부분 왕과 태자의 안녕을 비는 대목이 나오는데 미륵사 석탑 사리봉안기에는 사찰 창건 동기와 태자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봐 사탁적덕의 딸인 백제 왕후와 의자태자와는 친모자관계가 아닐 것”이라고 추정했다.
아울러 ‘역사는 이긴 자의 기록’이라는 말을 거듭한 이 교수는 “중국의 역사책인 ‘수서’에 백제에는 신라, 고구려, 왜인 등이 섞여 있으며 중국인도 있다고 했듯이 고구려의 69만 호(戶)보다 많은 76만 호를 거느린 대국 백제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고찰이 이뤄져야한다”고 덧붙였다./임연희 기자
'역사의 흔적따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제 금동대향로의 새로운 발견 (0) | 2011.01.26 |
---|---|
미륵사 서동설화 재논의 여지 있어 (0) | 2011.01.26 |
1600년전 백제 금동관 (0) | 2011.01.26 |
600년 전 경복궁 흔적발굴 (0) | 2011.01.26 |
광화문 복원 (0) | 2011.01.26 |